나를 필요로 하는 차례를 기다리면서 대기를 하고 있는 야근의 새벽.

 

  이 와중에도 틈만 나면 끝없이 움직이는 손끝을, 시선이 닿는 모든 곳들을, 밀려드는 졸음을 날카롭게 베어 버리는 기억이 있다. 속수무책 당하는 것 말고는, 조용히 지나가주기를 바라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새벽 2시가 가까워지는데 일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집에 돌아갈 수도 없는 애매모호한 시간을, 날 선 기억은 결코 봐주지 않는다. 재빠르게 어디든 파고들어, 주욱 찢어버리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 네가 이래도 잊을 수 있어?

 

  그럴리가, 없다는 것을 안다.

 

 

 

 

 

 

 

 

  지난 주말 부산에 놀러온 친구와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다 들른 카페의 냅킨에는 Pm. 2:45 coffee라고 프린팅 되어 있었다. 새벽 2시 45분은 살면서 가장 힘든 시간대에 속해 있고는 했다. 어느 시기의 나는 이 시간에 언제나 깨어 있었고, 술을 마시거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드라마시리즈 따위를 연달아 보면서 술을 마시는 것과 드라마 내용 이외의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잠이 오지 않았으므로, 깨어 있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어떻게든 버티지 않으면 괴로운 기억들이 내 안을 침식시켰다. 사람들을 커피와 담배를 줄이거나 끊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실제로 카페인과 니코틴에 중독되다시피 하면서 10년 넘게 지낸 상태라 그 양을 줄여도 당장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다시 커피를 사발로 들이붓고 흡연 습관을 버리지 못 했다.

 

 

 

  어쩌다보니 부산에 와서, 어쩌다보니 하루 최대 2잔의 커피만으로, 흡연량은 큰 일이 없고서야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다. 아무도 강요한 사람이 없었는데 몸이 말을 안듣기 시작하거나, 체력의 한계를 몸으로 느껴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현상이었다. 솔직히 지금도 언젠가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하다는 강박이 있다. 현실적으로는 그 반대를 향해 가고 있는 듯하지만.

 

 

 

  어쨌든 제대로 카페인과 니코틴의 섭취량을 확 줄인 지금도 기억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잠을 자면 꿈속까지 괴롭히는 악몽에 힘든 밤도 종종 있어 출근의 부담이 없는 주말에는 자지 않고 버티기도 해봤지만, 별 소용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나. 무엇이 문제인지를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하는 걸까? 가능한 일인지 의심만 커지고.

 

 

 

 

  내 몸뚱아리이고 내 감정인데 자꾸 놓는다. 될 대로 되라지 해버리고 그냥 괴로워하다가 이유 없는 이 끔찍한 순간이 지나가면 다시 일상으로 복귀, 그 뿐이다. 예전에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는데 지금은 특정 기억=괴로움, 으로 인이 박인 듯하다. 괴로울 이유가 없는데도 괴롭고, 나는 이제 그걸 어떻게 해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잠깐만 참으면 다음 날들을 그럭저럭 괜찮다고 믿기 때문이겠지.

 

 

 

 

  지인들에게 나는 괜찮다고 말해왔다. 호주에 나갔다 돌아온 시기부터 최대한 그렇게 생각하려고도 노력해왔다. 그러다보면 정말 괜찮은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그런 착각에 빠져 더 열을 올려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다행이라고 말했다. 다행인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72 오클라호마는 괜찮단다.

저런 차량번호판 문구를 생각한 사람은 사는 게 괜찮았을까?

 

 

나는 안 괜찮다.

I am not ok.

라고.

 

 

 

오늘만 좀, 괴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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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행의 풍경이 그러했고 당신의 환한 웃음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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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 같은 건 아무려나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세월호 사건으로 날짜가 미뤄진 그린 플러그드 덕분에 생일 전날과 당일날을 서울에서, 지인들과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케잌이나 파티 같은 건 정말 싫지만, 그래도 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니까.

 

 

 

 

 

 

 

 

 

 

 

  그건 그렇고,

 

 

 

  어제 내가 들었던 말들 중에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좋아했던 선배의 이야기였다. 내게는 호주 체류 당시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결혼 소식에서 멈춰 있는 그의 소식이, 친구들의 입에서 순식간에 터져나왔다. 궁금했던 일이긴 했어도 내가 묻기도 전에 친구들의 결혼 이야기, 아이 이야기를 듣다가 준비없이 그 이름을 듣게 되니 갑자기 몸이 얼었다. 그가 친구에게 태어난 아기의 사진을 계속 보낸다는 이야기도, 그 이름과 안부를 듣는 것도 이제는 내 감정을 크게 건드릴 리가 없는 것인데, 대체 왜 이러는 걸까를 한참 고민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고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더 이상 선배와 연락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 한 때는 참 가깝고 다정한 선후배였는데 내가 그를 4년 넘게 좋아했던 걸 고백해버렸다는 이유로, 일주일의 불장난으로, 누구도 내게 공지해주지 않았던 선배의 결혼식이 지나 지금까지 5년 이상을 연락을 끊은 채 지내왔기 때문에, 기회를 잃었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만나기 힘든 좋은 친구를 잃어버리기 전에, 나는 호주로 도망가지 않았어야 했고, 쿨하지 못 했더라도 기다리지 말고 친구들에게 소식을 먼저 물었어야 했다.

 

 

 

  이제 나의 삶과 그의 삶은 아주 긴 직선의 끝과 끝을 향하고 있고,잘 지내느냐고 사는 것은 어떠냐고 안부를 물을 수도 없다. 어쩌면 선배를 만나 제가 그 때 왜 그랬을까요 하고 웃고 떠들수는 있겠지만 그 자리에는 예전의 나도 없고, 그도 없을 것이다.

 

 

 

  하필 내가 내 생일에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그 애들의 결혼생활과 엄마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내가 거부하거나 도망갈 수 없는 타이밍에, 내 사연을 다 아는 친구들조차 어쩌다보니 선배의 이야기를 해버려야 했던 그 순간에...

 

 

 

  말을 돌리지도 못 하고 적극적으로 끼어들수도 없었던 대화들이 오고 갔다. 나는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몰랐고 아빠가 되었는 줄도 몰랐고 그가 사는 곳이 어디인지도 몰랐으며 무엇보다도 그가 나 빼고 다른 사람들과는 지속적으로 안부를 물으며 지낼 수도 있었겠구나 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척 힘이 들었다.

 

 

 

  함께 속해 있었던 어떤 사회에서 방출되어 버렸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그 곳에 적을 둘 수 없으리라는 것.

 

 

 

  이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단지 한 사람을 잃었다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이제 그와 연결된 모든 관계들로부터도 멀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가 여전히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내가 그들과 새롭게 다시 맺은 관계일 뿐 이전에 우리가 함께 공유했던 테두리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다시는 복구되지 않는 데이터베이스처럼 많은 것들을 제목도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가물가물한 옛 일로 추억하게 되겠지. 그리고 기억은 쉽게 뒤틀리고 변형되어 언젠가는 아무 일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그 때 내가 슬펐었는지 기뻤었는지 조차도 내가 기억하고 싶은대로 바뀌어 있을 테니까.

 

 

 

 

 

  어쨌든, 그래도,

 

 

  

 

 

  어제 내가 들었던 말들 중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고은아, 였다. 이름이라는 것이 불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따뜻한 것이었나 싶었을 정도다. 무슨 이야기를 시작할 때 고은아, 고은씨 하면서 운을 떼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면, 내가 의미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때로는 친숙한 애칭이나 별명으로 불러주어도 참 좋다.

 

 

 

 

  더 이상 나를 불러주지 않을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어, 지금은 나를 불러준 이들에게 집중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려고 한다. 그것이 유일한 자구책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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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 일로 상품 진열대 같은 종류의 물품들을 찾고 있었는데, 회사 대표의 위시리스트는 경사도가 있는, 상품을 세워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쩌다보니 찾는 아이템들마다 모양새가 대충 삼각형.

 

 

 

  그러니까 대충 아래 같은 느낌...

 

 

 

 

 

 이런식이라든가...

 

아님 이런식.

 

 

 

 

  다 좋은데, 문제는 빗변의 길이를 알아야 회사 상품인 책, 엽서 등을 진열했을 때 어떠 느낌일 지 알 수 있을텐데 어디에도 빗변 길이는 표시가 안 되어 있다는 점. 에이 몰라, 하고 무시하려던 순간 갑자기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이었던 수학선생님이 말씀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니들은 수학이 사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 없을 것 같지? 살아봐라. 필요한 순간이 오나 안 오나."

 

 

 

  초등학교 때는 수학경시반까지 했었는데 중학생이 되자마자 수학은 찍어도 풀어도 100점 만점에  4-50점대, 고등학교 때는 80점 만점에 10점대를 꾸준히 유지해온(?)나에게 수학은 점수 깎아먹는 과목이었다. 산수만 마스터하면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다고 생각했고(지금도 솔직히, 그렇기는,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수학이라는 단어는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홍 선생님의 저 말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삼각형, 그래 삼각형이 문제였지. 내 머리가 포맷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히 내게도 삼각형 두 변의 길이를 알 때, 혹은 끼인각을 알 때 나머지 변 구하는 방법 쯤은 기억의 창고 어디쯤 저장돼 있을 것이었다.

 

 

 

  현재 고등학생들이 이 포스팅을 혹시라도 보게 된다면 나를 비웃을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결과적으로 기억의 저장고 안에서 수학 공식 하나조차 건져내지 못 했고 심지어 검색을 통해 공식을 알아낸 후에도 싸인, 코싸인, 비율 같은 말들이 낯설어 이런 미ㅓㅏㅈ댜ㅓㄹ;ㅐ댜ㅓ래;ㅑㅓ래더 라고 욕을 해야 했다.

 

 

 

  물론 이걸 몰랐다고 해서 내 삶이 크게 달라지거나, 주변인들에게 멍청이 취급을 당하는 것은 아닐테지만(아마도)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상당히 참담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한 번 외운 건 단박에 까먹기 일쑤, 잊어버리지 않으려면 평생 주기적으로 한 번씩은 무슨 일이든 기억해내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 슬퍼졌다. 그리고 다시 생각나는 선생님의 말.

 

 

 

  <수학이 사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 없을 것 같지? 살아봐라. 필요한 순간이 오나 안 오나>

 

 

 

  내가 수학공부를 제대로 안 한 걸 후회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다만 수학 공식을 이런 식으로도 쓸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외우는 방법 말고 다른 공부 방법을 제공받았어야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회사에서 진열대 빗변의 길이를 구해야 하는 날이 올 수도 있으며 무조건 외워서 시험 잘 보고 끝낼 생각만 하지 말고, 얘들아, 왜 그런지 생각이라는 걸 좀 해라, 라는 말을 들었어야 했던 건데.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이 배우는 수학 물리가 전체적으로 이해에 초점을 맞춰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지금 나 같은 삼십대 수학 무식이가 증명하듯이, 암기된 공식은 기억 안 나면 끝이다.

 

 

  어제 점심에 제육볶음을 먹은 것을 잊고 오늘 또 제육볶음을 시킨 뒤 요즘 고기가 왜 이리 질리지라고 말하는 슬픈 직장인의 혼잣말 만큼이나 슬픈 일을 겪었다. 흙흙 ㅠㅠ.  아무리 수학을 못 해도 직각삼각형의 빗변 길이를 맞추는 문제는 외운 공식 덕에 틀려본 적이 없었던 평범한 문과 학생이 서른두살이 되어 줄자로 대충 비슷한 사이즈 삼각형을 만들어 미션을 해결했다는 그런 슬프고도 슬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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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중요한 사람과 함께 했기 때문에 매순간이 특별하게 남기도 한다.

  어느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함께한 사람들을 의미있게 만들기도 하고.

 

  매순간을 특별한 일상으로 보내게 해주었던 많은 사람들을 가졌으면서도 왜 이리 사람이 고픈가를 고민하던 중에 문득,

 

  '내게는 미친듯이 뜨거웠던 순간이 없었구나'

 

깨닫는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순간이 너무 뜨거워서 견딜 수 없었던 적이 없었구나.

 

  그래, 욕심이 너무 많은 것도 맞는 말이긴 하다. 좋은 사람들을 갖었으니 뜨겁지 않으면 어떤가 싶을 것도 같지만, 그러다가도 왈칵 왈칵 내 안을 드나드는 뜨거움에 대한 갈망, 그걸 어찌하지 못 해 죽겠다. 내 안에 어떤 뜨거움이라도 있기는 하다면 그것은 뜨것운 것을 향한 내 마음 자체가 뜨거운 것일 테다.

 

  달아올라 손끝도 못댈 정도로 뜨거워져보고 싶다. 보이지 않았던 작은 불덩이가 불어나고 불어나 인생의 한 순간을 활활 태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활활 타서 잿더미가 되는 광경을 지켜보고 싶다. 아, 이제 끝났구나 하는 걸 느끼고 싶다.

 

  어리석은 걸까.

  쉬운 길을 놔 두고 복잡한 길로 들어서고 싶어하는 걸까.

  정직하고 곧은 내 몸은 아직도 나와 맞지 않다.

  내 몸이 나와 맞지 않아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까.

  나는 뜨거운데 몸은 미적지근해서?

 

 

 

 

  그냥 이런 고민들을 한다. 요즘 뭔가 삶이 다시 재미없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변화, 변화, 뜨거운 불덩이를 안고 변화의 순간이 내게 다가오기를 숨죽여 기다리는 중이다. 봄이 왔는데도 시린 손발을 뭔가가 덥혀 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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