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잎새

낡은 연애사 2014. 12. 3. 00:58




내가 아주 간신히 이 생에 매달려있다는 것을 보셨지요? 압니다, 어느 결에 이 치열했던 그리움도 결국은 바람 따라 나뒹굴게 되리란 것을.


다만, 당신을 추억하는 마지막 겨울이 왔기에, 나는, 최선을 다하여, 죽음을 맞이하고 싶을 뿐이예요. 이해해주세요. 끝이 정해져있었던 시나리오의 엔딩을 이제야 꺼내어 읽는다고 생각해주세요.


그리 호기롭게 고백하는게 아니었는데. 그랬다면 사시사철 당신이라는 나무를 뒤덮은 푸른 잎새로 남을 수도 있었을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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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대신

낡은 연애사 2014. 9. 18. 18:57




언제부턴가 나는 사랑을 더는 믿지 않게 되었다. 굳이 무언가를 믿어야 하는 거라면, 사랑이 아니라 사람을 믿으려고 한다.

사랑 대신 의리를 외치는 많은 이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는, 마침내 사랑 대신 상대방을 믿을 수 있는 견고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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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 같은 건 아무려나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세월호 사건으로 날짜가 미뤄진 그린 플러그드 덕분에 생일 전날과 당일날을 서울에서, 지인들과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케잌이나 파티 같은 건 정말 싫지만, 그래도 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니까.

 

 

 

 

 

 

 

 

 

 

 

  그건 그렇고,

 

 

 

  어제 내가 들었던 말들 중에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좋아했던 선배의 이야기였다. 내게는 호주 체류 당시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결혼 소식에서 멈춰 있는 그의 소식이, 친구들의 입에서 순식간에 터져나왔다. 궁금했던 일이긴 했어도 내가 묻기도 전에 친구들의 결혼 이야기, 아이 이야기를 듣다가 준비없이 그 이름을 듣게 되니 갑자기 몸이 얼었다. 그가 친구에게 태어난 아기의 사진을 계속 보낸다는 이야기도, 그 이름과 안부를 듣는 것도 이제는 내 감정을 크게 건드릴 리가 없는 것인데, 대체 왜 이러는 걸까를 한참 고민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고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더 이상 선배와 연락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 한 때는 참 가깝고 다정한 선후배였는데 내가 그를 4년 넘게 좋아했던 걸 고백해버렸다는 이유로, 일주일의 불장난으로, 누구도 내게 공지해주지 않았던 선배의 결혼식이 지나 지금까지 5년 이상을 연락을 끊은 채 지내왔기 때문에, 기회를 잃었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만나기 힘든 좋은 친구를 잃어버리기 전에, 나는 호주로 도망가지 않았어야 했고, 쿨하지 못 했더라도 기다리지 말고 친구들에게 소식을 먼저 물었어야 했다.

 

 

 

  이제 나의 삶과 그의 삶은 아주 긴 직선의 끝과 끝을 향하고 있고,잘 지내느냐고 사는 것은 어떠냐고 안부를 물을 수도 없다. 어쩌면 선배를 만나 제가 그 때 왜 그랬을까요 하고 웃고 떠들수는 있겠지만 그 자리에는 예전의 나도 없고, 그도 없을 것이다.

 

 

 

  하필 내가 내 생일에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그 애들의 결혼생활과 엄마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내가 거부하거나 도망갈 수 없는 타이밍에, 내 사연을 다 아는 친구들조차 어쩌다보니 선배의 이야기를 해버려야 했던 그 순간에...

 

 

 

  말을 돌리지도 못 하고 적극적으로 끼어들수도 없었던 대화들이 오고 갔다. 나는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몰랐고 아빠가 되었는 줄도 몰랐고 그가 사는 곳이 어디인지도 몰랐으며 무엇보다도 그가 나 빼고 다른 사람들과는 지속적으로 안부를 물으며 지낼 수도 있었겠구나 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척 힘이 들었다.

 

 

 

  함께 속해 있었던 어떤 사회에서 방출되어 버렸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그 곳에 적을 둘 수 없으리라는 것.

 

 

 

  이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단지 한 사람을 잃었다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이제 그와 연결된 모든 관계들로부터도 멀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가 여전히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내가 그들과 새롭게 다시 맺은 관계일 뿐 이전에 우리가 함께 공유했던 테두리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다시는 복구되지 않는 데이터베이스처럼 많은 것들을 제목도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가물가물한 옛 일로 추억하게 되겠지. 그리고 기억은 쉽게 뒤틀리고 변형되어 언젠가는 아무 일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그 때 내가 슬펐었는지 기뻤었는지 조차도 내가 기억하고 싶은대로 바뀌어 있을 테니까.

 

 

 

 

 

  어쨌든, 그래도,

 

 

  

 

 

  어제 내가 들었던 말들 중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고은아, 였다. 이름이라는 것이 불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따뜻한 것이었나 싶었을 정도다. 무슨 이야기를 시작할 때 고은아, 고은씨 하면서 운을 떼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면, 내가 의미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때로는 친숙한 애칭이나 별명으로 불러주어도 참 좋다.

 

 

 

 

  더 이상 나를 불러주지 않을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어, 지금은 나를 불러준 이들에게 집중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려고 한다. 그것이 유일한 자구책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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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나는 흘러 흘러 너의 꿈속으로 간다. 그 곳에서 너와 나는 서로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너를 버린다.너도 나를 버려야 한다.
우리들은 사랑하면서 사랑 아닌 다른 것은 실천하지 않았다. 이런 사랑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진짜 나한테 왜 그래, 라고 물어도 답이 없는 관계다 우리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전혀 알수 없지만 끝없이 상처를 주고 받았다. 주고 받는다. 주고 받을 것이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댄이 한국에 왔다.

  그는 여전히 나에게 집착하고 나는 그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아무도 사랑할 수가 없고 그는 드디어 나만 본다.

 

 

  뭐 이런 거지 같은 경우가.

 

 

 

  어차피 그는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일과 비자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타국 사람은 없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나는 지금 아무도 사랑할 수가 없다. 세상을 살아내는 것조차 버겁다. 그냥 길 거리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것만으로도 벅찬 시절을 살고 있다. 그러니 어떤 좋은 사람을 만나도 즐거울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마녀사냥 초기의) 허지웅 됐다.

  이러니 연애가 재미있을 턱이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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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에는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던 영화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감독으로도 잘 알려진 가스 제닝스 감독의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과 함께하는 영화이기도 하고.

 

  아주 오랫동안 좋아했었던 남자에게 우발적으로 고백한 뒤 하게 되었던 데이트 때, 필름 포럼에서 마침 상영중이었던 이 영화를 봤다. 그는 이 시간엔 아마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고 지나가듯 말했었는데 극장에는 우리 빼고 개미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있거나 말거나 어차피 보이지도 않았을 테지만). 지하에 있는 작은 상영관에는 우리 둘 뿐이었고,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고, 영화가 상영되기 직전 극장은 암전이 되었고, 우리는 키스했다. 세상이 갑자기 나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려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면 되는 것이라고 믿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와 나는 잘 되지 못 했다. 그에게는 의리를 지켜야하는 애인이 있었고, 나는 난데없이 선택의 순간에 이성을 되찾았다. 얼마 지속되지도 못 할 이성이 왜 하필 그 순간에 출현한 건지 아직도 의문이다. 아마 그가 나를 여자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우리는 친한 선후배였다) 이 우스꽝스런 시나리오의 결말이  눈에 훤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착한 사람 코스프레라도 하고 싶었는지도.

 

  고백 이후 딱 일주일 거의 매일 만나며 때때로 우리는 선을 넘었지만 거기에 일말의 사랑이라도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내가 가졌던 오랫동안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좋아해주는 판타지를 가졌고, 믿었고, 일주일의 혼란 속에 그 판타지 멜로에 탑승했다가, 끝내는 그것으로부터 조롱당했다.

 

  버스안에서부터 필름포럼까지 내내 붙잡았던 손에 땀이 흥건했었다. 놓고 싶지 않았던 그의 손을 떠올리면 지금도 좋다. 그가 나를 버리기 애매한 후배로 생각했더라도 좋았고, 오랜 연애의 틈을 잠깐 메우는 여자로 생각했어도 괜찮다. 나는 아직도 선배라는 단어를 내뱉으면서 스스로 흠칫 놀라곤 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일어날 일은 그의 말처럼 일어나게 되어 있었고, 일어났고, 아팠고, 지금은 연락조차 주고받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선배는 내 연애의 트라우마가 되었지만 더이상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은 아니다. 내가 왜 그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그것이 삶의 원동력이 된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나는 더 많이 그를 좋아했고, 그의 세계를 사랑했다. 그것이 진짜였든, 속임수였든 중요하지 않다. 그로 인해 내 세계는 살짝 뒤틀려졌고 방향은 전환이 되었으며 나는 또 다른 내가 되었다.

 

  나(실제의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은 아주 졸작으로 관객 두 명의 초라한 기록을 남기고 잊혀져갔다. 그러나 데뷔작을 시작으로 나의 세상은 다르게 굴러갔고, 그 세상을 잘 다듬어가며 나는 계속 살아가고 있다. 매순간 행복하려고 노력하면서.

 

 

 

 

  언젠가 한번은 다시 만나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알던 그가 아니라도 웃으며 인사할 수 있을 때, 하지만 내가 아직 닳고 닳은 한심한 인간이 되기는 전에 반드시 그를 보고 웃으며 인사하고 싶다.

  내가 아직도 기억해. 현실에 발목잡히지 말자던 너의 말을 기억하고 있고, 그렇게 하며 살아가느라 내 인생은 이 지경이 되었지만. 나쁘지 않은 시간이라 참 고마워.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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