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문득 만나게 되는 계단과 좁은 골목길들이, 벽들이, 낡은 대문들이 나에게 내지르는 말들이 있어. 그걸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정도가 될 것 같아. 그럼 나는 또 악질러. 그러니까 알고 싶어서 내가 아직도 이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여름 내내 열심히 부산의 원도심을 돌아다녔지만 해답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런 상태로 나는 한 권의 사진에세이 원고를 써내야 했지.

 

  물론 나의 원고에 나의 진심이 들어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한 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모든 여행에세이 작가들이 이런 식으로 책을 한 권씩 낸다면 그건 진짜일까, 거짓일까. 거짓말을 하려던 건 아니지만 거짓말을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 하지만, 그렇다고 내 맘대로 책 안 내겠다고 할 수는 없는 거야. 나는 '회사'에 소속된 사람이고, 소속된 '입장'으로 일을 한 거니까.

 

  이 회사랑, 회사 사람들에게 모두, 나는 참 고마워. 이런 나를 받아준 게 참 감사해. 뭐가 되었든 기회를 주어서, 기뻐. 그런데 말이야. 나는 요즘 참아내는 나를 발견했어. 모난 부분이 독특하다고 나를 받아주었던 사람들이 내가 모난 부분을 좀 다듬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 시작했거든. 울컥하는 나를 누르고 대신 '네'라고 대답해야만 했지.

 

  그런데 말이야. 정말 그 모난 부분을 다듬고 나면, 내가 완벽해지는 거야? 처음의 내가 없어지면, 유일했던 내 모난 매력은 사라지는 걸까? 모가 좀 나기는 했어도 예의 없지 않았는데. 왜 대다수가 불편해하지 않는 둥글둥글한 사람처럼 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표면을 좀 튀어나왔다는 이유로, 잘 굴러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매끈하게 다듬어나가야만 하는 걸까?

 

  들어줄 사람도 없는 곳에서 나는 자꾸만 내뱉아봐. 대체 이유가 뭐지. 나는 나를 버리면서까지 동그란 사람으로 살아야하는 걸까? 이미 벽을 만들고 창문도 닫아놓고서, 절대 하면 안 되는 일들을 수백가지 정도는 다들 안고 살면서, 타인에게 솔직해지자고, 마음을 열자고, 유연한 사고를 하자고 하는 건 참 슬픈 일인 것 같아.

 

 

  내 성격에 인격을 부여한다면 내 성격은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평생 진심을 숨기던지, 다 보여주고 많은 걸 잃어야할 텐데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 정신없이 살고 있으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지금은 가진 것이 없어 조용히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해.

  하지만 아주 조금의 여유가 생겨 내가 할 수 없었던 것들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다시 프리랜서가 되어야할 것만 같아. 근근하게 사는 프리랜서, 나는 계속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

 

 

  하지만 아직은 직장생활을 할 때. 나는 여전히 가난하고, 커리어도 없고, 동료도 부족하니까. 조금만 더 모든 자원을 모으자. 그리고 나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한 몇 년만 더.

 

 

  설마 더더 거리다가 그만 내 인생이 사라지지는 않겠지.

  불안하다, 아주 오랫만에 이토록 불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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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17

406호의 입장 2013. 11. 18. 11:17
  대구에서 부산까지 올라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중간에 도시 두 개를 들렀고 두 번째 도시를 막 떠나왔다. 기사는 고속도로가 막히니 나머지 여정 중 얼마간을 국도로 이동하겠다고 했다.
  잠이 오질 않아 커튼을 열어보니 간간히 보이는 주유소나 편의점을 제외하면 밖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밤의 적막을 견디는 오래된 건물과 들판이 보이는 전부다.
  국도를 타고 느릿느릿 밤을 거슬러 전라도 강진과 서울, 충남 부여와 서울을 오고가던 어린 시절의 명절이 문득 떠올랐다. 힘들고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으나 어린 나와 동생은 물론이고 엄마 아빠도 지금보다 훨씬 마음이 여유로웠던 것 같다. 우리들은 스산한 바깥풍경을 보며 자주 길을 헤매거나 낯선 거리에 감탄해 멈춰서고는 했었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버티며 간신히 가족, 이라고 말...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삶은 팍팍하지 않았고 돌아가는 것이 어리석지 않은 삶일수도 있음을 배우며 컸던 시절이다.
  나직이 코고는 소리와 기사님이 틀어 놓은 트로트만으로 채워진 버스는 자꾸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구불구불한 국도를 따라 달린다. 그래선가? 멀미하듯 이리 옛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게. 울렁울렁하지만 참아야하는 것,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옛 기억을 가지고 현재와 저울질하는 것은 참 처량하다.
  어찌되었건 삶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이 많은 법이다. 기똥차게 재밌던 순간과 서글퍼 울던 일, 잘나가던 시절과 찌질했던 행동들, 내려놓아야 하는 범주에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공존한다.
지난 일이야 어찌되었든 지금부터 조금씩만 더 잘해보기로 하면 그뿐이다. 어쨌든 나는 잘 걸어가고 있다. 느리지만 신중한 태도, 나는 이런 속도로 사는 것이 참 좋다.
  KTX를 탈 수도 있었지만 멀미를 참아가며 버스에서의 시간을 견딘다. 데려온 후배 직원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이렇게 쓸데없이 오래걸리는 경로를 택한 건 그냥 나에게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낯선 이들 틈바구니에서 짜증스러워하는, 이런 내가 어이없어지는, 난 왜 이렇지 질문하게 되는, 그러나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것임에는 변함 없는 것을 인정하는, 그런 시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 나만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을 갖기 위해 완행버스나 기차에 오르는 것은 참 그럴싸하고 낭만적인 방법이다.

  부산으로 가고 있다. 해야할 것들에 대한 가닥이 조금씩 잡혀가는 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멀미가 더 심해지는 고로 이쯤에서 잡설은 그만하기로

 

2013. 11.17 밤 페이스북 업로드 글.

친구 하나가 대구에서 부산은 내려가는 거라고 지적해줬다.

나는 아직도 서울사람 마인드를 버리지 못 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고 나니 조금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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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별희.

이런 영화였던가.

아주 오래만에 다시 꺼내보니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장국영 때문에 봤던 모든 영화들은, 다시 볼 때마다 나를 슬픔에 잠기게 한다.

나이를 먹어가니, 이제는 시대와 시간이 인간을 어떻게 만드는지가 보이고, 화려한 경극 장면들만 뇌리에 박혔던 전과 달리, 그 장면들은 더없이 한없이 그 무엇보다도 단지 순수해 보인다.

우리, 문제적 30대들이 극 속 청년들과 같은 시대와 아픔을 겪으며 자란 세대라면 우리에게 예술은 어떤 의미가 되었을까. 나는 세상 가장 아름다운 우희 역의 데이가 되었을지 데이로 불리기 전의 사내아이였으나 계집아이도 아니었던 창녀의 아이로 살았을지 

잘 모르겠다. 그런 격동의 시대는 살아본 적 없어 죽을 때까지 절대로 완벽한 공감 같은 것은 못하겠지. 나는 그저 패왕별희 속 세 남녀의 관계 속에서 연민만 잠시 엿보고 나왔을 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장국영의 영화들은 그의 삶을 많이 짓눌렀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쉬어가지 않았던 배우다, 라는 느낌이다. 완벽한 각색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던 야반가성에서조차도, 나는 그런 것을 느꼈다. 빠순이라서 그렇다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대학교 새내기 때 그가 죽었다. 강의 중 하나에서 짧은 이야기를 제출하라고 했을 때 울면서 이건 소설도 아니고 팬픽도 아니며 추모글도 아닌 이상한 에세이를 썼던 적이 있었다. 장국영이 죽었다고를 내가 먼저 썼어야 했는데...(이건 그냥 정신나간 소리).


어쨌든 너무나 매력적인 영화다.


장국영, 그대가 웃으면 그곳에 꽃비가 내리고는 했다. 그렇게 봄을 가져왔던 나의 영원한, 당신! 




참으로 센티멘털해지는 일요일 밤이다. 

그러나 이런 감성은 닥쳐오는 월요일과 함께 닥쳐질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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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연애를 안 해도 괜찮은가에 대해 생각해봤다.

연애를 시도하기 전까지 그냥 한 번 그렇고 그런 사이나 되보자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만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뻔한 수작을 모른척 넘어가야 하는 것이 싫고, 허풍떠는데 웃어주는 것도 귀찮고 애초에 생각도 없이 너랑 나랑 결혼하면, 으로 시작하는 뻥을 듣는 것도 짜증난다.

정말 좋은 사람이 있다면, 작업 같은 걸 안 걸어도 서로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 듯도 하다. 나를 싸고 있는 포장들을 예쁘게 걷어내고 겉껍데기도 내용물도 과연, 너야, 고은아 하면서 좋아해주는 사람을 기다리고 싶다. ...

왜 내 기다림을 백마탄 왕자님이나 눈 높은 노처녀로 정의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이 기다리고 기다려도 안 나타난다면 결혼을 안 해도 좋을 것 같다. 나이를 더 먹으면 결혼하기 힘들다는 말은 결혼과 가족과 씨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아내가 되고, 또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는 경험은 분명 무지하게 특별한 경험이고 값진 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여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모든 인간은 이 특별한 포지션과 경험을 위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다.

1. 좀 안타깝지만, 사랑과 존경과 헌신이 조금이라도 억울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사람과 사느니 그냥 외롭게 사는 편을 택하겠고
2. 여자로서 가장 중요할 수 도 있는 임신과 육아를 책임감과 준비 없이 때가 됐으니까라는 이유로 시작하지 않겠다.

나는 독신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아무하고나 결혼하고 싶지 않을 뿐이며
나는 나를 좀 존중받고 싶고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것이고
나는 기다림의 끝이 결핍일 수 있다는 것을 감당하기로 했다.

그러니 참으로 내 인생은 괜찮은 편인데, 부모도 아닌 작자들이 왜 이렇게 내 인생에 감 놔라 대추 놔라 지랄들인지 너나 잘하세요 진짜.

대체 누가 감히 내 인생을 행복하지 않다고 정의할 수 있어?
나는 언제나 최대한 행복하려고 하고 때문에 조금이라도 행복하다.
이렇게 되기까지 숱한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그러니까 나는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기다릴테야.

좀 외로우면 어때
외로워도 할 일 많고
외롭우니 사람다운 생각도 하게 된다.

 

 

 

 

앞으로는 페이스북에 올리는 긴 글을 함께 게시하는 방향으로 블로깅을 해야 겠다.

여기저기 공간이 많아지니 여기가 휴면계정이 되기 일쑤고 해킹도 당하고.

그리고 페이스북은 지난 글 보기가 많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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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는 부산, 그리고 나는 어쩐지 이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

 

  내 연봉은 2천, 그나마도 아직 정직원이 아니다. 인턴기간이니까. 이번주가 4주차, 일은 슬슬 몸에 익어 가고 있는 중이다. 3년간 한국에서의 경력이 없는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사실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무작정 여기 들어온 건 아니다. 한 시간 반의 긴 면접 시간 동안, 불안하면서도 재미있을 것만 같은, 내가 더 나이 먹기 전에 함께 시작해도 좋을 것 같은 신생회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연봉을 적게 부른 건 내 탓도 있다. 하지만 연봉을 적게 불렀으니 내가 이렇게 덜컥 부산에서 일까지 하게 됐겠지. 사실 내  마지막 연봉이(연봉이라고 부를 만큼 오래 일한 곳이 없지만서도) 2100정도였던 걸 감안해보면, 조금 슬픈 일이긴 하지만, 최대한 일을 즐겁게 하면 된다는 쪽으로 생각하며 버티는 중이다.

 

 

  호주로 다시 돌아가 정착해서 사는 걸 심각하게 고려하고 준비까지 조금씩 해왔지만 부모님과의 마찰을 나 스스로 견딜 수가 없어 마지막의 마지막 타협점으로 선택한 구직이다. 어차피 마지막이라면은, 해외가 안 된다면은, 적어도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연고지가 아닌 곳에서 그렇게 시작해보고 싶었다. 나는 나의 서른이 절대 늦지 않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므로.

 

 

  하지만 시시때때로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과 가족들과 혹 그 비스무레한 테두리 안의 사람들로부터 나는 학대받는다. 학대라고 표현해서 미안... 하지도 않다. 진심으로 학대라고 생각하니까. 나는 나의 용기를 격려받는 쪽이 좋다. 30년동안 '너는 대체 왜'라는 말과 '멍청하다'는 말을 수시로 듣고 살았는데 지금 내 꼴을 보니 그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니, 내게는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북돋는 말들을 취하는 편이 더 행복하다는 말이다.

 

 

  내가 부산에 내려오기로 결정하고 내려와서 가장 크게 좋아진 점은, 이 거지같이 외로운 시간들을 버티면서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못되게 굴었던가, 별 것도 아닌 일에 왜 그토록 신경질적인 말을, 가시돋친 언행을 서슴지 않았나를 끝없이 반성한다는 점이다. 되돌아보니 어쨌거나 그들은 한 때 나를 사랑해준 사람들이었는데, 나도 사랑했던 사람들인데 다정했던 사람들끼리 물어뜯느라 우리는 청춘을 조금은 헛되이 쓴 것이 아닌가 싶다.

 

 

  항상 좋을 수는 없지만, 나는 왜 그토록 항상 안 좋으려고 발악을 했을까? 죽는 게 삶의 목표인 사람처럼, 그러니 최대한 우울하고 아픈 삶을 살아야하는 것처럼, 남을 헐뜯어서 나는 배로 헐뜯겨야 했던 날들이 너무나 많았었다. 나락으로 빠지는 것만이, 그래서 기어코 비명지르도록 아픔을 느껴야만 존재한다고 믿었던 날들도 그러하다.

 

 

  하지만 나는 정말 밝게 살고 싶다. 내 여정에 언제나 좋은 날만 있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아는데

 

  - 어 째 서 이 토 록 좋 은 날 들 을 허 비 하 며 살 아 야 한 단 말 야

 

 

 

 

  아직도 남아 있는 나의 사람들과 내가 아프지 않은 날들에 감사하며 강건히 이 세상을 버티고 살아나가는 것, 그것이 나의 꿈이고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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