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17

406호의 입장 2013. 11. 18. 11:17
  대구에서 부산까지 올라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중간에 도시 두 개를 들렀고 두 번째 도시를 막 떠나왔다. 기사는 고속도로가 막히니 나머지 여정 중 얼마간을 국도로 이동하겠다고 했다.
  잠이 오질 않아 커튼을 열어보니 간간히 보이는 주유소나 편의점을 제외하면 밖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밤의 적막을 견디는 오래된 건물과 들판이 보이는 전부다.
  국도를 타고 느릿느릿 밤을 거슬러 전라도 강진과 서울, 충남 부여와 서울을 오고가던 어린 시절의 명절이 문득 떠올랐다. 힘들고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으나 어린 나와 동생은 물론이고 엄마 아빠도 지금보다 훨씬 마음이 여유로웠던 것 같다. 우리들은 스산한 바깥풍경을 보며 자주 길을 헤매거나 낯선 거리에 감탄해 멈춰서고는 했었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버티며 간신히 가족, 이라고 말...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삶은 팍팍하지 않았고 돌아가는 것이 어리석지 않은 삶일수도 있음을 배우며 컸던 시절이다.
  나직이 코고는 소리와 기사님이 틀어 놓은 트로트만으로 채워진 버스는 자꾸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구불구불한 국도를 따라 달린다. 그래선가? 멀미하듯 이리 옛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게. 울렁울렁하지만 참아야하는 것,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옛 기억을 가지고 현재와 저울질하는 것은 참 처량하다.
  어찌되었건 삶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이 많은 법이다. 기똥차게 재밌던 순간과 서글퍼 울던 일, 잘나가던 시절과 찌질했던 행동들, 내려놓아야 하는 범주에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공존한다.
지난 일이야 어찌되었든 지금부터 조금씩만 더 잘해보기로 하면 그뿐이다. 어쨌든 나는 잘 걸어가고 있다. 느리지만 신중한 태도, 나는 이런 속도로 사는 것이 참 좋다.
  KTX를 탈 수도 있었지만 멀미를 참아가며 버스에서의 시간을 견딘다. 데려온 후배 직원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이렇게 쓸데없이 오래걸리는 경로를 택한 건 그냥 나에게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낯선 이들 틈바구니에서 짜증스러워하는, 이런 내가 어이없어지는, 난 왜 이렇지 질문하게 되는, 그러나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것임에는 변함 없는 것을 인정하는, 그런 시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 나만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을 갖기 위해 완행버스나 기차에 오르는 것은 참 그럴싸하고 낭만적인 방법이다.

  부산으로 가고 있다. 해야할 것들에 대한 가닥이 조금씩 잡혀가는 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멀미가 더 심해지는 고로 이쯤에서 잡설은 그만하기로

 

2013. 11.17 밤 페이스북 업로드 글.

친구 하나가 대구에서 부산은 내려가는 거라고 지적해줬다.

나는 아직도 서울사람 마인드를 버리지 못 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고 나니 조금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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