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 적이 없고, 뛰어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요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2년의 호주 생활에서 내게 남은 것은 몇몇 '사람'이었고, 나는 그 사람들을 '음식'을 먹여서 꼬셔(?)냈으므로 음식이란 나에게 모든 관계의 허브 역할을 해주었던 셈이었다. 궁극적으로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최상의 매개체가 바로 Food였기 때문에 나는 경력과 전공과는 상관없이 요리하는 여자가 되는 것이 꿈꾸었었다.

 

  내 꿈은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묵살당했다. 내가 나이가 많아서였고, 다시 한국을 떠나려 해서 였고,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이 무모하다는 이유여서였고, 나는 그만큼의 재능은 없다고 해서였고, 무엇보다 나는 내 꿈을 지키기 위해서 부모와 싸우는 일에 이전부터 너무나 취약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 아주 작은 회사에 다니면서 작가라는 직함을 달고, 실제로는 작가 업무 대신 잡다한 일들에 더 많이 치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개인 화장실이 포함된 고시원의 좁은 방에서 기거하면서 버는 돈만큼 소비해야 생활이 가능한 상태이고, 아무래도 이런 고생을 한 일년 정도는 더 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것이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럭저럭 일에 보람도 있고, 무엇보다 여기는 부산이며, 집에서 다시 멀어졌고, 나는 스스로를 장기체류자, 여행자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모든 일은 다 지나가는 한 때의 것이라고, 그러니 괜찮다고 나를 위안할 수가 있다.

 

  다만, 내게는 따뜻한 밥 한 끼를 차려서 먹여줄 동네 친구가 없고, 그나마 나를 위한 요리가 가능한 공간도 없다. 이것이 문제이다. 부산에 내려온 이후 거의 모든 끼니를 바깥에서 사먹고 있어 식비도 엄청나게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주방에서 뭘 만드는 것이 끔찍하게 싫다. 내 것이 아니라고 설거지를 안 하고 가는 얌체들 때문이기도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주방을 혼자 휘휘 돌아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냥 음식을 만들면 슬퍼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사람들을 끌어모아 방에 앉혀두고 한 손엔 맥주 한 손엔 국자를 든 채 니들은 가만히 있어 음식은 내가 알아서 다 할게 재밌게 떠들어봐 나 좀 웃게 주방에 기웃거리지 말고 음악이나 좀 틀어줄래 정 하고 싶으면 양파나 까 감자를 까든지 따위의 말을 하며 양조절이 안 돼 엄청난 분량의 음식을 만들어놓고 맛있게 안 먹으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도 하고 설거지는 니들이 해라 따위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뜬금없이 옛 사진을 올려본다. 쌀 모양의 파스타, 리조니를 마트에서 발견하고 흥분해서 구매해 마을을 떠나는 워홀러 친구를 위해 만들었던 오븐 파스타... 물론 다들 쌀이라고 생각해 오븐리조또라고 오해하는 사태가 발생했지만 인기는 있었다. 오븐 음식과 치즈는 옳기 때문에...

 

 

 

  오늘은 회사 출근해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그래서 쓸데없는 포스팅을 해본다. 티스토리에는 이런 포스팅 안 하려고 했었는데... 그냥 지껄이고 싶다 오늘은! 내가 이렇다고! 하고 싶은 게 있었다고!!!

블로그 이미지

Felis G.

다시 시작된 이야기

,

2013. 11. 17

406호의 입장 2013. 11. 18. 11:17
  대구에서 부산까지 올라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중간에 도시 두 개를 들렀고 두 번째 도시를 막 떠나왔다. 기사는 고속도로가 막히니 나머지 여정 중 얼마간을 국도로 이동하겠다고 했다.
  잠이 오질 않아 커튼을 열어보니 간간히 보이는 주유소나 편의점을 제외하면 밖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밤의 적막을 견디는 오래된 건물과 들판이 보이는 전부다.
  국도를 타고 느릿느릿 밤을 거슬러 전라도 강진과 서울, 충남 부여와 서울을 오고가던 어린 시절의 명절이 문득 떠올랐다. 힘들고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으나 어린 나와 동생은 물론이고 엄마 아빠도 지금보다 훨씬 마음이 여유로웠던 것 같다. 우리들은 스산한 바깥풍경을 보며 자주 길을 헤매거나 낯선 거리에 감탄해 멈춰서고는 했었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버티며 간신히 가족, 이라고 말...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삶은 팍팍하지 않았고 돌아가는 것이 어리석지 않은 삶일수도 있음을 배우며 컸던 시절이다.
  나직이 코고는 소리와 기사님이 틀어 놓은 트로트만으로 채워진 버스는 자꾸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구불구불한 국도를 따라 달린다. 그래선가? 멀미하듯 이리 옛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게. 울렁울렁하지만 참아야하는 것,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옛 기억을 가지고 현재와 저울질하는 것은 참 처량하다.
  어찌되었건 삶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이 많은 법이다. 기똥차게 재밌던 순간과 서글퍼 울던 일, 잘나가던 시절과 찌질했던 행동들, 내려놓아야 하는 범주에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공존한다.
지난 일이야 어찌되었든 지금부터 조금씩만 더 잘해보기로 하면 그뿐이다. 어쨌든 나는 잘 걸어가고 있다. 느리지만 신중한 태도, 나는 이런 속도로 사는 것이 참 좋다.
  KTX를 탈 수도 있었지만 멀미를 참아가며 버스에서의 시간을 견딘다. 데려온 후배 직원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이렇게 쓸데없이 오래걸리는 경로를 택한 건 그냥 나에게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낯선 이들 틈바구니에서 짜증스러워하는, 이런 내가 어이없어지는, 난 왜 이렇지 질문하게 되는, 그러나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것임에는 변함 없는 것을 인정하는, 그런 시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 나만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을 갖기 위해 완행버스나 기차에 오르는 것은 참 그럴싸하고 낭만적인 방법이다.

  부산으로 가고 있다. 해야할 것들에 대한 가닥이 조금씩 잡혀가는 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멀미가 더 심해지는 고로 이쯤에서 잡설은 그만하기로

 

2013. 11.17 밤 페이스북 업로드 글.

친구 하나가 대구에서 부산은 내려가는 거라고 지적해줬다.

나는 아직도 서울사람 마인드를 버리지 못 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고 나니 조금 부끄러워졌다.

 

블로그 이미지

Felis G.

다시 시작된 이야기

,
왜 연애를 안 해도 괜찮은가에 대해 생각해봤다.

연애를 시도하기 전까지 그냥 한 번 그렇고 그런 사이나 되보자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만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뻔한 수작을 모른척 넘어가야 하는 것이 싫고, 허풍떠는데 웃어주는 것도 귀찮고 애초에 생각도 없이 너랑 나랑 결혼하면, 으로 시작하는 뻥을 듣는 것도 짜증난다.

정말 좋은 사람이 있다면, 작업 같은 걸 안 걸어도 서로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 듯도 하다. 나를 싸고 있는 포장들을 예쁘게 걷어내고 겉껍데기도 내용물도 과연, 너야, 고은아 하면서 좋아해주는 사람을 기다리고 싶다. ...

왜 내 기다림을 백마탄 왕자님이나 눈 높은 노처녀로 정의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이 기다리고 기다려도 안 나타난다면 결혼을 안 해도 좋을 것 같다. 나이를 더 먹으면 결혼하기 힘들다는 말은 결혼과 가족과 씨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아내가 되고, 또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는 경험은 분명 무지하게 특별한 경험이고 값진 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여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모든 인간은 이 특별한 포지션과 경험을 위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다.

1. 좀 안타깝지만, 사랑과 존경과 헌신이 조금이라도 억울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사람과 사느니 그냥 외롭게 사는 편을 택하겠고
2. 여자로서 가장 중요할 수 도 있는 임신과 육아를 책임감과 준비 없이 때가 됐으니까라는 이유로 시작하지 않겠다.

나는 독신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아무하고나 결혼하고 싶지 않을 뿐이며
나는 나를 좀 존중받고 싶고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것이고
나는 기다림의 끝이 결핍일 수 있다는 것을 감당하기로 했다.

그러니 참으로 내 인생은 괜찮은 편인데, 부모도 아닌 작자들이 왜 이렇게 내 인생에 감 놔라 대추 놔라 지랄들인지 너나 잘하세요 진짜.

대체 누가 감히 내 인생을 행복하지 않다고 정의할 수 있어?
나는 언제나 최대한 행복하려고 하고 때문에 조금이라도 행복하다.
이렇게 되기까지 숱한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그러니까 나는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기다릴테야.

좀 외로우면 어때
외로워도 할 일 많고
외롭우니 사람다운 생각도 하게 된다.

 

 

 

 

앞으로는 페이스북에 올리는 긴 글을 함께 게시하는 방향으로 블로깅을 해야 겠다.

여기저기 공간이 많아지니 여기가 휴면계정이 되기 일쑤고 해킹도 당하고.

그리고 페이스북은 지난 글 보기가 많이 어렵다.

 

 

 

블로그 이미지

Felis G.

다시 시작된 이야기

,

 

 

   여기는 부산, 그리고 나는 어쩐지 이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

 

  내 연봉은 2천, 그나마도 아직 정직원이 아니다. 인턴기간이니까. 이번주가 4주차, 일은 슬슬 몸에 익어 가고 있는 중이다. 3년간 한국에서의 경력이 없는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사실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무작정 여기 들어온 건 아니다. 한 시간 반의 긴 면접 시간 동안, 불안하면서도 재미있을 것만 같은, 내가 더 나이 먹기 전에 함께 시작해도 좋을 것 같은 신생회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연봉을 적게 부른 건 내 탓도 있다. 하지만 연봉을 적게 불렀으니 내가 이렇게 덜컥 부산에서 일까지 하게 됐겠지. 사실 내  마지막 연봉이(연봉이라고 부를 만큼 오래 일한 곳이 없지만서도) 2100정도였던 걸 감안해보면, 조금 슬픈 일이긴 하지만, 최대한 일을 즐겁게 하면 된다는 쪽으로 생각하며 버티는 중이다.

 

 

  호주로 다시 돌아가 정착해서 사는 걸 심각하게 고려하고 준비까지 조금씩 해왔지만 부모님과의 마찰을 나 스스로 견딜 수가 없어 마지막의 마지막 타협점으로 선택한 구직이다. 어차피 마지막이라면은, 해외가 안 된다면은, 적어도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연고지가 아닌 곳에서 그렇게 시작해보고 싶었다. 나는 나의 서른이 절대 늦지 않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므로.

 

 

  하지만 시시때때로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과 가족들과 혹 그 비스무레한 테두리 안의 사람들로부터 나는 학대받는다. 학대라고 표현해서 미안... 하지도 않다. 진심으로 학대라고 생각하니까. 나는 나의 용기를 격려받는 쪽이 좋다. 30년동안 '너는 대체 왜'라는 말과 '멍청하다'는 말을 수시로 듣고 살았는데 지금 내 꼴을 보니 그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니, 내게는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북돋는 말들을 취하는 편이 더 행복하다는 말이다.

 

 

  내가 부산에 내려오기로 결정하고 내려와서 가장 크게 좋아진 점은, 이 거지같이 외로운 시간들을 버티면서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못되게 굴었던가, 별 것도 아닌 일에 왜 그토록 신경질적인 말을, 가시돋친 언행을 서슴지 않았나를 끝없이 반성한다는 점이다. 되돌아보니 어쨌거나 그들은 한 때 나를 사랑해준 사람들이었는데, 나도 사랑했던 사람들인데 다정했던 사람들끼리 물어뜯느라 우리는 청춘을 조금은 헛되이 쓴 것이 아닌가 싶다.

 

 

  항상 좋을 수는 없지만, 나는 왜 그토록 항상 안 좋으려고 발악을 했을까? 죽는 게 삶의 목표인 사람처럼, 그러니 최대한 우울하고 아픈 삶을 살아야하는 것처럼, 남을 헐뜯어서 나는 배로 헐뜯겨야 했던 날들이 너무나 많았었다. 나락으로 빠지는 것만이, 그래서 기어코 비명지르도록 아픔을 느껴야만 존재한다고 믿었던 날들도 그러하다.

 

 

  하지만 나는 정말 밝게 살고 싶다. 내 여정에 언제나 좋은 날만 있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아는데

 

  - 어 째 서 이 토 록 좋 은 날 들 을 허 비 하 며 살 아 야 한 단 말 야

 

 

 

 

  아직도 남아 있는 나의 사람들과 내가 아프지 않은 날들에 감사하며 강건히 이 세상을 버티고 살아나가는 것, 그것이 나의 꿈이고 현실이다.

 

 

 

 

블로그 이미지

Felis G.

다시 시작된 이야기

,


  내가 불편하면 나 같은 성격과 어울려주는 쪽도 몇 배로 힘들거라고 생각하면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실제로 내가 좀 심하게 엄격한 부분도 있고 깍쟁이 같은 면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웃음이 안 나오는 상황에서도 내가 너무 안 좋게 생각하니까 다 안 좋아보이는 거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면서 그래 알았어, 그러지 뭐, 그렇게 해, 라고 말하는 것 역시 그 이유다.



  그러나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내 맘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로 적당한 선에서 의견을 좁힐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닌데, 맘 아프기만 오지게 아프고, 스트레스 받아 탈모만 생기잖아. 뭐 이런 류의.



  그래도, 오래 가까이 지낸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기가 싫다. 가깝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냉정하게 잘 얘기하는 편이면서 나야말로 정말 못 됐다. 오래 만난 만큼 양보할 것들을 양보하게 되고 싫은 소리도 서로 싫지 않게 들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참 좋을 텐데.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별 것 아닌 일들이다. 예민하게 구는 내가 더 싫다. 단순하게 얘 왜 이래, 하고 어깨 한 번 으쓱 해버릴 수 있을 만큼만 간단명료하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안 된다, 잘.






  싫은 소리마저도 예쁘게 들리도록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없어 곁이 참 그리운 날이다.



  덧붙임) 난 이들을 사랑하고 있기나 했던 걸까. 별로 사랑하질 않았어서 더 그런 건 아닌가. 쿨한 척 하는 관계 같은 거 정말 싫다. 사람 사이가 백막년 쿨하기만 하다고 상상하면 그런 관계는 처음부터 안 만들고 싶어.


블로그 이미지

Felis G.

다시 시작된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