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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다

406호의 입장 2010. 10. 24. 23:48
 
  살면서 이렇게까지 낯설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홍콩 공항에서 한참을 헤맸다. 화장실에 물건을 두고 와서 찾으러 갔는데 찾는 화장실 위치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환승 트레인을 타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르겠어서 무작정 익스큐즈미만을 외치며 물어 물어 간신히 환승게이트를 찾았다. 다행히 비행기에 올랐는데, 승무원이 내 말을 못 알아들어서 이상한 기내식을 줬다. 브로콜리가 엄청 익어서 식감이 거의 없었다. 후추 범벅을 하고 나니 겨우 먹을 만 했다. 옆 자리엔 중국인이 앉았다. 그녀도 말을 못 하고 나도 말을 못 했다. 서로 애틋했지만,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다만 알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에는 손짓으로 가르쳐줬다. 내가 노다메 칸타빌레 후편을 보며 깔깔댔더니 그녀도 잠시 후에 노다메를 봤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잠시였다. 호주 공항에서 입국심사를 받는데 영어 못 하는 나를 심사관이 엄청 무시했다. 모를 수도 있지!! 그러나 생각보다 쉽게 빠져나갔다. 친구 동생이 픽업을 나와주었다. 그 애의 교회 친구가 나를 픽업해주었고 나중에 픽업비를 지불하기로 하고 내가 살 집으로 갔다. 집주인은 한국인, 다행이라며 기뻐하는데 룸메이트는 영어 잘 하는 일본인 유카였다. 유카는 심지어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머지 친구들의 국적은 홍콩과 말레이시아. 어쨌건 인사는 미루고 짐 대충 풀고 잤다. 일어나서 유카의 도움을 받아 친구 동생과의 약속 장소에 갔다. 시간 맞춰 갔는데 그애가 지각을 했다. 그 사이에 술 취한 외국 남자 사람이 웃통을 벗고 도로를 질주하며 여기 저기 시비를 걸었다. 무서웠다. 약속장소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걸었는데 거기 서있던 여자가 왓츠더매러, 소 테러블, 이라고 말하며 나를 보고 눈을 찡긋했다. 나머지 말은 못 알아들어서 그냥 헤실헤실 웃어줬다. 좀 늦게 도착한 친구 동생을 따라 교회를 갔다. 교회를 다니겠다고 마음 먹고 갔는데 막상 가보니 역시 내 갈 곳 아니라는 생각만 농후하게 들었다. 게다가 무려 네 시간이나 교회에 있었다. 시티까지는 그래도 한 아주머니가 태워다 주시고 친절히 길안내를 해주셨다. 그러나, 길 잃었다. 한인마트를 찾아내느라 애 먹었다. 물건을 조금 샀는데 7만원 넘게 나왔다. 그래도 울지 않았다. 먹고 살기는 해야지. 한국인 청년에게 길을 물어 집 방향을 알아내고 집에 걸어갔는데 막상 건물 안에 들어가서 집을 못 찾았다. 리조트형 아파트라서 구조가 미로 뺨 먹었다. 수영장 있고 체육관 있으면 뭐 해, 나 같은 년이 길도 못 찾게 만들어놓고. 암튼 열쇠구멍이 맞길래 낮선 곳 문을 열었다. 어떤 외국인이 후아유, 한다. 암쏘쏘리 아이로스트를 외치고 도망나왔다. 그래도 어떻게 집에는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듯했다. 배가 고파졌다. 핫케익을 구웠다. 굽고 있던 도중에 홍콩친구 링이 들어왔다. 말을 걸어줬다. 고마운데 무섭다. 핫케익을 권했는데 안 먹었다. 얘기하며 버벅대다가 마지막 핫케익이 탔다. 하지만 깔깔 웃었다. 그 와중에 유카가 왔고, 링은 오버쿡된 핫케익에 대해 설명하며 자기 잘못이라고 했다. 아니야, 조이, 이건 내가 바보라 그래, 라고 속으로 생각만 하며 유카에게 핫케익을 권했다. 코리안 핫케익을 맛있게 먹어줬지만 별로 맛이 없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 친구 링이 들어왔다. 또 얘기를 걸어줬다. 진땀이 났다. 이번엔 핫케익을 권하지 않았다. 또 거절당하면 울 것 같았다. 단 걸 먹었으니 스파이시한 걸 먹어야 한다며 유카가 신라면을 가져와 끓여줬다. 양파를 넣어 끓였길래 별 생각없이 오, 다마네기, 했더니 일어를 하냔다. 노 아 저스트 라이크 저패니즈 드라마, 했더니 유카가 양아에 관한 일본 드라마가 있니, 라고 개그를 쳤다. 오 유카, 너 꽤 재미난 뇨자. 암튼 유카의 신라면까지 해서 다 먹고 나니 타버린 핫케익은 애물단지 그냥 저장해놨다. 아, 그러고보니 유카가 오전에 파리가 고(꼬)여 라는 한국말을 했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코리안인데 뭐 이런 말을 가르쳤나 싶어서 좀 웃었던 기억이 났다. 저녁에 내 노트북이 말썽을 부려서 인터넷이 안 잡혔다. 주인 언니랑 언니의 아는 한국인 남자 사람이 와서 봐주었는데도 안 되다가 정작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갑자기 인터넷이 잡혔다. 어쨌든 신나서 어깨춤을 춰버렸다. 모두가 웃었으니 다행이다. 한참 주방 식탁에 앉아 인터넷을하는데 하나 둘 방으로 들어가고 나만 남았다. 406호 살 때 기분이 들었다. 샤워 할 때 순서 맞추는 거랑 말 안통하는 거랑 내가 길치인 거랑 집세가 좀 비싼 거랑 드렁큰 맨들이 많은 것만 빼곤 어쨌든 죽지 않고 살 만한 도시다. 집 앞에 바로 공원도 있고 걸어서 15분이면 시내다. 그러니, 잘 살아봐야겠다. 




  어쨌든 지금은 퍼스다. 그러니까, 내가 어쨌든 오기는 왔나보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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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를 보내고, 고양이가 쓰던 물건들을 차례로 보내고,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뭘 자꾸 가져가라고 하고, 책이나 물건을 판다. 돌아오는 주말에는 옷을 좀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집을 비우는 일은 의외로 빠르게 진행된다.

  마음의 결정은 아직 아무것도 내리지 못했는데, 몸의 결정이 이토록 빠르다. 몸이 정직한 걸까, 마음이 어리석은 걸까. 마음이 신중한 걸까, 몸이 함부로 내지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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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

406호의 입장 2010. 5. 21. 19:55

  곧, 돌아가, 나.

  여기서 참 많은 일이 있었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고, 창문 너머는 폐허였다가 신축 빌라가 생겨났고, 몇 번인가 애인이 생겼다가 없어졌다가, 울었다가 또 웃고는 했었어. 딱 이 시기가 되면, 저 멀리 건물들 너머로 불꽃놀이 축제 때문에 불꽃의 끄트머리가 샐죽 고개를 내밀었다 사라지기도 했지. 고개를 창문 밖으로 쑥 내밀고 앞집 남자를 관찰한 적도 있었어. 좋아하는 사람이 놀러오기도 했었지.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달리기도 하고,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오면서 맥주를 한 잔 홀짝이기도 했어. 아파서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었는데. 

  내가 집으로 돌아간다고 고백했더니 이 말을 들은 지인들마다 족족 서운하다고 했어. 나라고 서운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일이 슬픈 일은 아니라고 했어. 그게 내 최선의 대답이었으니까. 종종 게을렀지만, 난 여기서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아왔으니까. 괜찮진 않았지만, 나쁠 것도 없잖아. 

  학창시절엔, 서울 올라가 혼자 살게 되는 게 내 인생 최고의 목표였는데 생각할수록 피식 웃음이 나. 어쩌면 인생의 목표를 하나쯤 달성해봤다는 것 만으로도 즐거운 거 아닐까 해서. 여기 와서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났고, 연애도 많이 했고, 오래 맘 끓이며 혼자 좋아했던 사람한테 고백도 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오롯한 내 공간을 꽤 오래 지속해보기도 했으니까, 그리 나빴던 것만은 아니야. 아니, 사실은, 진짜 좋았어. 쉰살이 되어서 내 20대를 기억할 때마다, 분명 즐거웠던 시간으로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다행이다. 후회하지 않고 떠날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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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부시다. 방 안 가득 빛이 스며든다.

 

  나를 설계한 사람은 창 없는 고시원 생활을 해본 것이 분명하다. 원룸의 한 쪽 벽면 절반을 창으로 만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불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큰 사이즈 덕에 세입자가 대단한 골초라거나 요리에 미숙해 매번 냄비를 태웠을 때에도 내게는 불쾌한 냄새가 배어 곤란해 본 역사가 없다. 아침마다 방 안 가득 빛이 들고 장마철의 축축한 공기도 한껏 느낄 수 있다. 방범창 같은 건 없지만 그 따위 물건은 이 건물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 오피스텔은 다른 건물과 마주하고 있지 않아 창을 열면 바로 탁 트인 하늘이다. 하늘을 두고 장애물을 설치해 놓았다면 맹세컨대, 절대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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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이건 좀 아니죠?


  오후 두세시면 응, 나도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지금은 새벽이잖아. 그리고, 올라가서 문을 두드렸으면, 일단 나와서 사과를 하는 게 예의고. 악기 연주 관둔 건 고마운데(가 아니라 당연한 거잖아!!), 다음에 문 두드리면 얼굴 보고 사과해주길 바랄게. 사과 받아야 하는 사람이 이렇게 정중한 글을 쓰고 있자니 아주 그냥 기분이 릋베ㅑㅐㄱ제러정;ㅐㅔㅏㅈㅊㄹ;ㅇㄺㅍㄱ 이렇다.


  자꾸 이러면 엘레베이터에 장문의 대자보를 붙이는 수가 있어. 더 하면, 집주인 누구냐고 물어서 집주인이랑 합의를 볼 수도 있지. 그런데도 내가 지금까지 참아온 건, 우리 506호 친구가 혹여라도 뮤지션이 꿈인 사람은 아닐까 해서, 맘이 짠해서였지.





  아니, 내가 여기 산 게 몇 년 째인 지는 아는 걸까. 아, 모르는 게 당연하구나. 어쨌든, 여기는 오피스텔이예요, 506호 친구. 네가 신나게 엠프 켜고 기타 연주를 할 때(정확히 어떤 소음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일을 못 하고 잠을 못 자고 두통이 생겨.





  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대체 그 얼굴을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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