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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호

406호의 입장 2008. 11. 27. 06:38

  새벽이지만 여전히 어둡다. 밤이 길어지자, 잠드는 시간은 더욱 늦춰지고 그러다보면 늦게 잠든다는 말보다 일찍 잠든다는 말이 어울리는 때가 된다.

  2046을 보고 있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소리가 울렸다. 아, 비가 오는구나 싶어 창문을 열어보니 역시 그렇다. 이 방에서 나가지 않은 게 몇일이나 되었더라? 이 오피스텔 406호에서의 4년. 나는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견딜 수 없이 익숙하다. 


  언젠가 이 방에 살면서 오늘의 빗소리와 비슷한 소리에 잠시 정신을 놓았던 적이 있었다. 그 땐 아직 창문 너머의 새 빌라가 지어지기도 전이었다. 밖이 이상하게 밝다 싶어 내다보았는데 그것은 빗소리가 아니라 오랫동안 버려져있었던 연립 앞에 불이나 무언가 타들어가고 있는 소리였다.

 
  비가 아니라 불의 소리라는 것에 잠시 망연자실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왜 그랬을까? 내가 좀 더 일찍 불이 났다라는 것을 알렸더라면 버려진 연립 앞의 앙상했던 나무도 완전히 타죽지는 않았겠지. 큰불이 나기 전에 불이 났음을 알리기는 했으나 나무는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소방차가 등장해 남은 불씨까지 전부 없앴을 때 안도감 대신 왠지 모를 아쉬움이 밀려왔더랬다. 무언가 굉장한 소란을 기대하는 마음과 위험에 대한 불안이 동시에 고개들었던 것을 스스로가 분명히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까맣게 그을린 나무와 건물의 외벽. 불량한 아이들이 한밤중에 몰래 피우던 담배꽁초들과 몰지각한 동네 사람들에 의해 불법으로 버려진 쓰레기들. 사람들은 떠나면서 버리고 간 낡은 가구. 시시때때로 몰려들어 싸우던 부도난 건물주와 세입자들.


  화재가 있던 그 날 이후로 몇 차례 비가 내리고 해가 뜨고를 반복했고 흉물스러웠던 연립은 곧 철거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사가 시작되고 새로운 건물이 차근차근 세워졌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이 방 406호에 창문 너머로 다 지켜보았고 빌라에 새 입주자들이 들어와 집을 꾸미고 밥을 먹고 섹스를 하고 때때로 내쪽을 흘끔거리는 것까지 다 보았다.

 
  아, 나는 처음 이 곳에서 살게 되었을 때 여기가 나만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아주 오랫동안 406호에서 많은 끼니를 때우고 밤새 생각하고 가끔은 애인을 불러 은밀한 밤을 보내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4년을 살면서 나는 진정한 내 공간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만을 깨달았을 뿐, 꿈결처럼 시간들이 아름답게 흘러갈 것이라는 바람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얼마나 더 이 곳에 머물러야 하는 걸까. 지독하게 익숙해진 이 공간에서, 철없이 독립 생활에 들떴던 내 20대 초의 모습에서, 여지껏 고집부리며 떼를 쓰며 소리를 지르며 버티는 짓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다. 나는 내가 이 모든 것들로부터 과연 진심으로 벗어나고 싶기나 한 것인지 그 대답부터 알아야겠다. 대체 내 속을 내가 하나도 모르겠으니 406호, 이 방은 참으로 요상한 곳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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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s G.

다시 시작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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