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훌쩍 지났고, 대학가에는 아이들이 넘쳐난다. 종종 홍대 쪽에 가게 될 때마다 거리의 여자들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옷차림이나 몸매 같은 것은 아니라고 말 못 하겠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활기다. 징그러울 정도록 싱싱한 웃음과 말투다. 봄이 왔는데 추워서 짜증이 난다고 말할 것이 아니다. 봄이 왔어도 여전히 움츠러든 내가 견디기 힘들 뿐이지.



  화창한 봄날 대학 본관 벤치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나눠 피우며 노닥거리던 순간들을 말할 때마다, 그 때는 진짜 즐거웠었지, 라고 말하곤 한다. 그 때가 정말 즐거웠을까? 생각해보니 장담할 수가 없다. 파릇파릇한 모든 것들이 그립지만, 막상 봄비에 잔뜩 젖어 나날이 푸르러지는 나뭇잎들을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기억하고 있다. 모든 것을 뒤덮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초록과 활개에 언제나 주눅이 들고는 했었지.



  봄이 왔다. 봄은 사랑스럽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싱싱하고 모든 것들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아름답지만, 정작 내가 성장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 또 두렵다. 4월은, 참 잔인하구나. 그 말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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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s G.

다시 시작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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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멀리 있던 지인들이 가까워질 때. 




  너희 탓을 했던가 내 탓을 했던가, 생각해 본다. 대개는 내 탓 하는 척 하면서 너희를 탓했었던가, 아니면 그 반대였던가. 어쨌거나, 어떤 식으로든, 진솔했던 적은 없다. 한 꺼풀 벗겨내야 보이는 진심 따위 누가 알아줄 턱이 있나. 매번 껍질 까주기만 기다렸으니 주변인은 떠나고 또 채워졌다.


  이러한 내 맺고 끊음에 있어서 최근 불평과 불만이 많아졌다. 억울해지거나 치사하게 느껴지거나. 나이를 갖게 될 때마다 옹졸해지는 것이 분명하다. 너그러운 마음씨를 자꾸만 잃게 된다.


  얼마 전 싸래기눈 내리던 날 대학 선배와 술을 한 잔 마시면서 내가 말했다.


  - 나는 아직도 몹쓸 병을 하나 가지고 있어요. 특별해지고 싶어하는 병이요. 아, 아니,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병. 그래서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종종 몹쓸 말을, 못된 행동을 하게 만드는 병.


  선배는 말했다. 자기 인생이 특별해야 하는 건 당연한 거다, 그게 왜 병이냐,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상처줄 수도 있는 거다. 아, 물론,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다만 내 이해라는 것이 이 정도에 그쳤다는 것 뿐.


  어쨌거나, 그 말, 뭔지 알면서도, 난 그 병이 너무나 싫다. 세상 가장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고 그렇게 살아오지도 못 했지만. 오히려 겉으로 괜찮을 거라고 하면서 내심 그래, 너는 그 정도 밖에는 안 되는 사람이구나, 난 아니야, 내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너와는 다를 걸, 이라던 이 오만함. 나는 이것이 참 싫다. 겉은 따뜻해질 수 있었지만 속은 여전히 이기적이고 멍청한 것이.


  할 일이라고는 전혀 없는 백수의 나날, 전화번호를 괜히 탐색하면서 지금이라도 먼저 손 내밀어 안부 물을 수 있는 인간이 몇이나 되나 세어보는 일이 왕왕 있다. 이제 그런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대개는, 나처럼 관계에 무덤하거나, 어떤 종류의 사심을 가지고 있거나, 속임수는 간파했지만 그럭저럭 나를 나쁘지 않은 애라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내 입장에서도 그건 마찮가지일 거고.     


  물론 내게는 아직 친구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외롭고 쓸쓸한 걸까. 베스트 프렌드라고 부를 만한 관계가 없어서? 나 참, 이 나이에 베프 타령이라니 배부른 소리 하고 있구나, 이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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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이

불안과 중증의 것 2010. 3. 9. 06:17


  오줌을 싸 놓아서 이불을 몇 차례나 빨고 이불이 없어 나는 추위에 떨며 며칠을 잠들었다. 깔 이불이 없어지자 이제는 매트 위에 직접 오줌을 싸려고 한다. 시도하다 내게 들켜서 혼났지만 기회를 봐서 금방 다시 오줌을 싸려고 든다. 고양이를 키우는 일이 쉽지는 않을 거야 라고 생각했지만 내 방에서 자는데 보일러도 틀어놓고 감기에 걸리다니, 좀 슬퍼진다.



  오줌을 싸거나 뭔가를 깨거나 하는 일들이 나를 화나고 불쾌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아마도) 확실하게 인지한 듯한 범은 이젠 조금만 혼내도 몰래 오줌을 지려 놓는다. 발정할 때가 돼서 스프레이를 하는 걸 수도 있고. 아무튼 중성화수술부터 빨리 시켜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재정상태는 제로에 가깝지만, 일단 카드(이게 무서운 짓인 줄은 알지만)로라도 수술을 시켜야 할 듯.








  애초에 생명체를 집에 들인다는 것 자체가 책임감 감수라는 걸 전제로 한 것일 텐데, 점점 지쳐가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아주 눈물겹다. 하루종일 집에 같이 있어준 것도 몇 달 째인데, 애정을 얼마나 더 줘야 만족하겠다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계속 패닉, 패닉, 패닉, 패닉이다.




  범도 불쌍한 놈이다. 좀 더 가족이 많은 곳으로 갔으면 사랑받을 성격이었겠지. 난 참, 연애할 때도 심한 애정결핍인 사람들과 엮이더니 애완동물을 키울 때도 랜덤으로 고른 아이건만, 역시나 애정결핍이로구나. 이쯤 되면 내겐 징징대는 사람들만 꼬이게 만드는 페로몬이 있다고 밖에는…….








  힘들다. 동물병원은 언제 문을 열까, 문의 전화를 좀 해야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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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든 여기, 서울에서, 내 힘으로, 버티고자 했던 결심은 무너지고 있다. 엄마에게 사실대로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공부를 다시 하든,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든, 집에서 경리를 보든, 일단 집 팔고 내려오는 걸 진지하게 고려해보라고 했다. 그러겠다고 했다. 주말에 부모님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이게 최선인가 싶기도 하다. 



  이번엔 마지막이다. 다시는 서울로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다.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 이 순간 내가 더욱 더 한심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와중에도, 뭐든 써야, 이렇게 나 한심한 년이라고 지껄이기라도 해야 마음이 안정된다는 것이다. 내 상황을 잔뜩 까발려서 기정사실화하는 것. 







  내 인생 가장 끔찍한 벌이 될 것 같다. 다시는 대전에 돌아가지 않겠다던 결심이 무너졌다는 것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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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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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연락해서 누군가와 술을 마시는 것, 고등학교 동창들의 여행에 동참하는 것, 마음 놓고 아픈 것, 대학 동기들과 최근 소설 얘기를 하는 것, 좋아해주는 마음을 즐기는 것, 좋아하는 마음을 어쩌지 못 하는 것, 진짜 사고 싶은 것들을 상상해보는 것, 애완동물에게 애정을 주는 것, 미워하고 할퀴는 것, 우는 것, 소리지르는 것, 거리를 걷다가 마음에 듣는 카페에 들어가는 것, 수다를 떠는 것, 진심을 말하는 것, 거짓말하는 것, 밑반찬을 만드는 것, 헛소리하는 것, 엄마와 이야기하는 것, 꺼이 꺼이 우는 것, 마음 놓고 잠드는 것, 좋은 꿈을 꾸는 것, 행복한 상상을 하는 것,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것, 쓰는 것, 불평하고 욕 하는 것, 정신없이 모르는 동네를 걷는 것, 모르는 사람과 해맑게 인사하는 것, 낡은 앨범을 찾아보는 것, 오래된 관계를 들춰보려는 것, 추억을 생각하는 것, 또 만드는 것, 모든 일을 숨기는 것, 까발리는 것, 다짐하는 것, 후회하는 것, 맛있는 걸 먹는 것, 맛 없는 음식 버리는 것, 의지하려는 것, 혼자 감당하려는 것, 예쁜 것, 예뻐지려는 것, 절망에 빠지려 하는 것, 기타등등 모든 것.






  심지어, 이도 저도 아닌 존재로 살아갈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조차도. 좋고 싫음의 경계가 사라지고 옳고 그름의 기준도 사라지고 남아 있는 내 가죽 껍데기는, 어느 노숙자의 추위를 달래주던  박스 만큼의 실용성도 가지지 않는다. 쓸모없다는 말이 어떤 건지, 얼마나 쓸모없기에 쓸모없다고 이름 붙여진 건지를 알 것 같다. 







  자괴가 도를 지나치는구나.






  나는 많이 많이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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