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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불안과 중증의 것 2011. 7. 16. 23:37




  같은 사람을 향한 자격지심을 느낀다.


  그가 천국을 걷고 있든, 나락에 빠졌든 거의 언제나 그를 시기하고 스스로를 한심해한다. 이게 무슨 짓인지 나도 모른다. 내가 질투하고 있는 대상이 내가 알던 어떤 특정한 시기의 그인지, 아니면 어떤 특정한 시기의 나를 괴롭게 하던 그인지도 모르면서.







  진짜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면서, 자꾸만 내 맘대로 안 되는 이유를 나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분명히 알고 있다. 잘 나가는 사람은 언제나 잘 나간다. 그들이 떨어지는 지옥은 내가 겪는 나락과는 분명히 다르다. 모든 것은 사람에 의존한다. 따라서, 나는 누구를 부러워하거나 그 때문에 스스로를 비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괴롭다면, 그건 나 때문이지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입으로만 안다 하지 말고, 온몸으로 알아야겠다. 온몸으로 알고 싶다.


  나는 너무 변명만 하고 그 변명에 빠져 사는 것이 많이 힘들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고 빨리 포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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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s G.

다시 시작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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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는 Kununurra, 에 있는 카라반 파크다. 백팩에 들어간 지 이틀인가 만에 다시 야영을 하기로 하고 여유롭다 못해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나날들을 보내다 그것마저 슬슬 적응된 상태다.


  어떻게 될지도 모를 이 곳 생활 속에서 불안하게만 보이는 연애를 시작하고 어정쩡하게 남자친구와 4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지내고 있는 것도 짜증이 나지만 사실 돈이 없으니까 그게 제일 힘들다. 일이라도 빨리 시작해야 마음이 편할 텐데.


  글쎄,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남자친구에 대한 애정은 거리가 멀어지니 어쩐지 조금 커진 모양이다. 이게 혼자 떨어져서 외로워졌기 때문인지 혹은 2달 내내 붙어 있던 게 그만 정이 들어버려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조금 더 다정해지고 조금 더 마음이 열렸다. 그러나 이 애는 곧 한국으로 들어갈 테고 나는 여기에 더 남아 이런 저런 나날들을 이어가야 할 테니 두고봐야 이 연애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눈에 좀 들어올 것 같다. 어쨌든, 지금은 그저, 있는 그대로 놓아두기로 했다.


  주연언니의 책을 빌려 읽고 있는데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다. 전에 한 번 읽었던 책이긴 한데 다시 읽어도 꽤 흥미롭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보면서 (지루함을 약간은 견뎌내야 했지만) 즐거웠는데 뭐랄까 프루스트라는 사람에 대해서는(보통의 해석이 맞다면) 좀 무섭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난 여기와서 점점 더 직설적인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어서 사람을 상처주지 않으면서(물론 그 이면에 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해도) 따뜻한 사람 가면을 쓰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가 뭐 좀 특별하거나 혹은 충분히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좀 괴팍한 사람이 되더라도 수긍될 수 있는 인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 와중에 맘에 있는 소리를 전부 다 해대는 못돼 처먹은 년이 되면 주변 사람들이 다 떨어져나갈 것 같은 불안함이 자꾸 든다. 아무튼 책 읽으면서 내내 그래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되는 거야 한다. 그러나 행동과 말은 계속 싸가지가 없어지고 있다.



  자꾸 내 몫 챙기기, 내 것 사수하기에 대한 집착이 커져간다. 이런 내가 무섭다. 



  일이나 빨리 들어갔으면 좋겠다. 일을 빨리 들어가야 돈이 들어올 거고 돈이 빨리 들어와야 쿡의 돈도 갚고 그 놈의 아이맥도 남자친구 사주고(쇄뇌당한 듯 하다 이미 사줘야 할 것 같다 뭐야 이거) 어학원 학비도 벌고 그러지. 



  한국 돌아가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늘 엄습한다. 무서워 죽겠다. 하지만 무서워하든 안 하든 난 이미 여기에 있고 시간은 흐르고 나이는 먹는다. 행복해질 수 있을까? 과연, 의문이다.



  뱅돌에게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안 는다. 당연하지. 처음 배우는 건데. 그러나 재밌다. 손가락 끝이 엄청 아리지만 변태인가 기분이 좀 좋다. 어딘가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아직 남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드니까 어쩐지 살아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거든.






  아, 철이 들어야 할 것 같다. 좀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만 있어도 철 안 들고 싶었는데 새삼 그런 거 기대하기엔 나이도 많고 나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아는데다 별다른 재능도 없는 것 같으니 이제 철 드는 편이 사는데 이득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아, 잡생각이 너무 많다. 한 가지만 보고 한 가지만 생각하면서 한 길로만 열심히 달리는 삶을 한동안 살고 싶은데 왜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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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s G.

다시 시작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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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잠시 대전 집에 들른 것처럼, 아직은 불완벽한 적응 상태를 보이고 있지만, 이제 더 이상 내가 돌아갈 서울 집은 없다. 부모님이 아침에 출근하시고 나면, 간단한 짐만 꾸려서 캐리어 하나 끌고 아주 낯선 도시로 떠나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젓는다. 힘도 없이 어딘가로 무작정 가볼 수 있을 만한 모험심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려온지 며칠 되지도 않았고 아직 내게 놀고 있다고 부담을 주는 사람도 없는데, 가족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주눅이 든다. 쉴 틈도 없이 이력서를 넣어보거나 한여름 대낮에 약속도 없이 무작정 나가 몇 시간씩 걷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실직자 아저씨들의 기분을 알 것 같기도 하고, 하하. 


  내려오기로 결심했던 순간의 마음가짐을 놓쳐서는 안 될 텐데, 자꾸만 주저앉고 싶어지거나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지니 큰일이다. 배가 고프다고 아무거나 주워먹으면 배탈난다는 말을 수시로 하고 다니는 주제에 정작 내가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지.






  내일은 아침 일찍 나가봐야겠다.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니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머리도 가벼워지고. 많이 걸으며,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좁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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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불안과 중증의 것 2010. 6. 21. 02:19

  1993년,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집에 부도가 났다. 대전으로 이사가 결정됐다. 왜 하필 대전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당시에 아버지가 대전엑스포와 관련되 일을 하면서 물건을 납품하던 것을 마무리했어야 했고 외가 식구들 중 일부가 한 때 대전에 살았던 적은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어째서 그런 결정을 했는지를 설명해줄 만한 이유는 명백히 없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한 번쯤은 나도 아버지께 묻고 싶었다. 왜 여기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물론, 물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적을 두고 살았던 곳을 떠날 때에는 두 가지의 경우가 존재한다. 이전보다 모든 상황이 나아졌거나 혹은 그 반대거나. 우리 가족의 경우는 분명 후자임이 분명했기 때문에, 묻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상처주는 말을 하는 것은, 더욱이 그 대상이 가족이라면, 내뱉는 쪽에서도 쉬운 일은 아닌 법이다.

  사실 나는, '이사'라는 것 자체에 다소 안 좋은 기억을 그 이전에도 가지고 있었다. 면목동에서 망원동으로 이사했을 때가 92년이다. 

  그 해 5월 30일 다니던 음악학원에서 개최하는 5번째 정기연주회에서 나는 부르크뮐러 6번(분명 쉽게 편곡되었을 것이 분명한) 앞으로 앞으로를 연주했다. 조금 더워지기 시작할 무렵이라 다들 반팔이나 민소매 드레스(혹은 턱시도를 입고 있었던 반면에 나는 자잘한 꽃무늬가 잔뜩 들어간,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정원피스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 동성음악학원 상패에 들어간 사진은 사방팔방 뛰어다니다 찍혀졌으리라 상상될 정도로 볼이 빵빵하고 빨간 우스꽝스러운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나를 보러 아무도 오지 않았지만, 나는 독기 반 즐거움 반으로 모르는 사람들 무리 속에서 연주를 했고 태어나서 내가 들어본 것 중 가장 엄청난 칭찬세례를 받았다. 그것이 혼자 겨울 원피스를 입고 온 여자애에 대한 측은지심이었다고 해도, 솔직히 위안받았다.

  갑자기 음악학원 이야기를 한 것은 그 정기연주회 이후로 우리 집의 이사가 결정되었고, 그 타이밍에 원장이라는 사람이 외국인이 운영하는 음악학원에 나를 넣어보자고 권유를 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나는 피아노를 소유하지 못한 채 학원을 다니는 소수 아이들의 무리에 속해 있었고 집에서도 억지로 다니길 강요한 적은 없었으나 웬일인지 순전히 오기로, 고집을 부리며 학원을 나가고 있었다. 당연히 그 때의 이사 역시 (아마도)상황이 나아져서 가는 것은 아니었으리라 짐작한다. 버스를 타고 혼자라도 다니겠다고 대성통곡을 해봤지만, 역시, 내 인생의 찬란한 기회(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학원 원장의 입김이었지 재능은 아니었다) 하나가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그 때 생각했던 것 같다. 이사만 안 갔어도 좋았을 텐데. 이사라는 건 참 슬픈 거구나. 이사한다고 더 좋은 곳에서 살게 되는 것은 아니구나. 

  다시 돌아와서 93년. 부도가 뭔지는 몰라도 차압이 뭔지는 알아버린 씁쓸한 초딩 인생을 좀 살펴보자. 대전에서 살았던 가장 첫번째 집은 당시에 이종사촌 언니가 거주하던 다세대 주택이었는데 말이 주택이지 요즘식으로 말하면 옵션 없는 원룸이나 하숙에 가까운 곳이었다. 거기서 내 생에 처음으로 쌀을 씻어봤다.왜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 할까를 생각하며 분노에 차 있었던 바람에 어찌나 박박 씻었는지 쌀이 모래가 될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간신히 얻은 집은 쪽방 두 개에 간단한 부엌이 달린 가겟집이었다. 화장실까지 밖으로 나 있는, 생각할수록 가관인 곳이었다. 겨울에 얼었다 녹은 화장실 스위치를 켜다 감전될 뻔 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까. 다달이 주인 아저씨가 험상궂은 얼굴로 어린 나와 동생을 찾아와 월세를 내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 때마다 나는 울었고 엄마는 욕을 하며 동네 아주머니들과 마늘 공장에서 하는 마늘 까기 아르바이트를 손이 진무르도록 해댔다. 

  그래도 이 집에 살았을 때 그나마 버틸 힘이 된 것은 글짓기 반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학 간 첫날 급식지원을 받으로 교장실부터 들어가야 했던 이후로 어쩐지 착한 애로 보여야한다는 강박 비슷한 것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그 모습이 이뻐 보였는지 담임 선생님이 어느 날 전교생이 했던 말도 안 되는 글짓기를 보고 나를 스카웃(?)했던 것이다. 한 번 와보라는 말에 방과 후 교실을 기웃거리다 집으로 도망간 나를 전교 2등하는 여자애가 찾아와 조곤조곤 이쁘게 말했다. '고은아, 내일은 도망가지 말고 꼭 들어오래.' 창피해서 고개만 끄덕이고 혼자 남아 울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전교 2등도 있었고 전교 1등의 여동생도 있었다. 알아차렸던 것 같다. 아,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구나, 하고.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뭐라도 써내려면, 거짓말을 해야 했다. 거짓말을 해서 자잘한 상을 몇 번 받았고, 성적은 차츰 올랐고, 선생님(참고로, 완전 호랑이였는데 나중에 다시 이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하고)이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우리 반에 복덩이가 전학을 왔구나.'
 
  힘을 가지고 나자 학교 생활이 편해졌다. 다다음해인가에 아버지도 차츰 일을 시작하고 빚을 갚거나 대출을 조금씩 늘려 이사를 결정했다. 이번에는 기차 굴다리 바로 앞에 있는 주택 1층이었다. 역시 방이 딸린 가게였지만 그나마 환경이 나아졌고, 학교에서 좀 멀어졌지만 전학은 가지 않았다. 그 학교에서, 나는 아주 조금이지만 관심을 받았고, 힘이 있었고, 친구가 생겼고, 여유를 찾았으니까. 어쨌든 그 집에서는 다행히 아버지 일이 조금씩 풀려서 가게를 늘려야 했고, 나와 동생은 옆옆집의 쪽방으로 하숙을 들어가게 됐다. 몇 년 사이에 몇 번의 이사를 했는지 세어 볼 여력도 없었다. 이사라는 단어 자체에 대항할 힘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 쪽방에서 꽤 오래 방목된 채로 생활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어느 날 동생이 체육중학교에 입학해 기숙사로 들어가자 그 곳은 온전히 내 곳이 되었다. 나는 마음대로 엇나가도 되었고 아닌 척 하며 착한 애처럼 굴 수도 있었다. 새벽에 조용해질 무렵이면 몰래 빠져나가 동네를 배회하며 기차소리를 듣기도 하고, 다락에 잡동사니를 쌓아두고 그 사이에 숨어있기도 했다.

  그러다, 몇 년 만에 화장실을 편하게 쓸 수 있는 집으로 다시 이사했다. 스무평 남짓 하는 아파트였다. 그 사이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부모님은 일 때문에 새벽 같이 일어나고 밤 늦게 돌아왔다. 그러다 같은 아파트 8층에서 11층으로, 이번에는 집을 사서 이사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상황이 나아져서 하는 이사였지만, 이사라는 것에 의지가 반영된 적도 없었고, 또 이사라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넘어서서 무감각의 상태에 이른 나는, 이제 이사보다는 내 공간만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사고가 변화했다. 어차피 방목된 지 오래되어 가족 따위 난 몰라, 랄까.

  그러다가 그 곳에서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공부는 할 수 있는 만큼만 했고 놀고 싶을 땐 놀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제법 한계를 아는 애여서 안 되는 것은 안 된다라는 속 편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안 좋은 짓이고 좋은 짓이고 가리지 않고 해대다 수능을 봤고 당연히 망쳤고 언제나 처럼 울었다. 솔직히 그 때 목표 대학 같은 건 없이 내가 선택한 곳(물론 서울)에서 살 수 있다면 대학은 상관없었다. 하늘의 뜻인지 학교 측의 실수인지 나는 뭐 하는지도 모르던 문예창작학과에 합격했고, 충대 따위 가서 초중고 동창을 다 만나며 학교 생활 하기는 싫다고 우겼고, 과천 이모네서 통학을 허락받았다.

  과천 이모네로 짐을 싸서 올라가고 나서 2003년도에 본가도 이사를 했다. 제대로 주택을 구입해서 10년 간 떨어져 살던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문제는 이 때부터 시작된다. 난 이 시기부터 집이 없었는데 다른 가족들에게는 온가족이 함께하는 집이 생겼다. 기껏해야 방학 때나 내려가서 몇 주 있는 곳이었다. 아무리 넓고 편해도, 그 집엔 내가 없었다. 집에 올 때마다 내가 모르는 가족들에 치여 다치고 서울로 돌아갔다.

  2006년에, 오랜 싸움 끝에 자취에 성공했다. 내 지인들이 자주 다녀가고 좋아하던(?) 406호다. 406호에 대한 얘기는 굳이 할 필요도 없겠지만, 어쨌거나, 처음으로 내 집이라고 생각했다. 뭐 사실 엄마 명의니까 엄마 집이겠지만, 그래도, 지난 4년 반 동안 참으로 다사다난한 일들이 벌어졌던 공간이다. 게다가 그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버라이어티하게 진행되었으니 즐겁기 짝이 없었다. 하하하하하하하. 

  대전으로 내려오는 것은 고백컨데 발톱을 숨기고 먹이를 얻기 위해 머리를 들이미는 고양이가 되는 일이다. 발톱을 뽑히게 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면서, 조용히 때를 기다려야겠다. 그 동안 타인이었던 가족들 곁에 가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이해시킬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그런 나 때문에 가족들이  맘 아파하지 않도록 적당한 연기 정도는 하면서, 다시 한 번 발톱을 세우고 몸부림치며 이제 좀 놔달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을, 기다려보자. 에미 에비 은혜도 모르는 천하의 나쁜년이 될 수 있을 때까지는, 좀 조용히, 수더분하게, 살도록 하고. 하긴, 이러다 시집이나 가게 된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지금까지로 말하자면,  자기소개서를 새로 써야 하는데, 진짜 그것만은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었던 한 여자가, 결국 술도 없이 혼자 수다를 떨고야 말았다는 그저 그런 이야기.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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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불안과 중증의 것 2010. 5. 11. 03:17

  몇 년 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본인의 책을 내신 대학 선배와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음... 모인 사람들은 다 같은 학회원들로 동기들과 한 학번 아래 후배, 그리고 선배까지 해서 총 6명.


  에, 일단 이지월 작가님의 '변두리 괴수전'(민음사)은 물론 사서 볼 겁니다. 초고를 읽긴 하였으나 몇 해 전 일이라 가물가물 하기도 하고 바뀐 부분도 있다고 하고 무엇보다도 선배의 책을 사주는 것은 후배의 도리(?)라는 생각도 들고 해서요. 예전에 능력이 되면 한 박스 정도는 사겠다고 했었던 기억이 나는데, 전 지금 전혀 능력이 없기 때문에 립서비스로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차피 혼자 노는 블로그 따위 누가 오겠나 싶지만은, 그래도 누군가 저 책을 보기 전에 이 글을 읽는다고 한다면, 신바람 이작가님 소설도 물론 재밌지만, 사람도 좀 웃기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허풍 90과 진실 10 정도를 보유한 고양이 키우는 오타쿠 남자? -_- 아, 전혀 책 판매에는 도움이 안 되겠군요. 하지만 저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뭐 이 얘길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문제는 이 날의 술자리. 먹어도 먹어도 취하지 않는데다, 별로 할 말도 없고, 가끔 그런 내가 신경쓰여 실없는 얘기를 계속 하질 않나, 가관이었습니다. 좋은 자리에서 굳이 내 현 상황의 심각성을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허허. 아무튼 밥 먹고 2차에 3차를 끝내고 합정역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금방 헤어진 후배에게 전화가 오더니 4차 제의를, 그리고 저는 덥썩. 


  후배는 눈치가 너무 빨라 고생하는 타입으로, 정신 못 차리고 우울에 빠져 있는 나를 건져주기 위해 우리 동네 근처까지 왕림하사 결국 해 뜰 때까지 맥주를 한 잔 더 해주고, 얘길 하거나 들어주고, 아침 9시에 교회를 가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많이 할애해 주었습니다. 고맙지만, 인생 피곤하게 사는 후배가 안쓰럽기도 하고.


  집에 돌아왔으나 잠이 든 것은 오후, 그 다음부터 하루 반나절이 사라진 채로 결국 이 시간에 이르게 됐다는 말씀.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빈둥대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지만, 머리는 이미 내일을 결정해버렸다는 슬픈 이야기, 랄까.







  여기서 도망갑니다, 곧. 적어도 이 방, 406호로는, 다시 기어들어오고 싶지가 않아졌어요. 무릎으로 기며 살게 되더라도, 죽지 않을 수만 있다면 머리 숙이고 살아봐야죠. 까짓, 시집을 가라면 가고, 집안일을 하라면 하죠. 어차피 사는 게 내 원한 대로 특별할 수만은 없을 테니까. 포기가 늦어져서 몸이 고생을 너무 했습니다. 이제 몸이 아픈 것도 지겹고 마음이 아픈 것에는 신물이 납니다.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되더라도, 절대 칭얼대는 일은 없어야 할 거라고, 독하게 마음 먹었습니다.




  아... 이런 식으로 멍청한 얘기를 하는 것도 참, 나쁘지 않군요. 어쩐지 속이 더 개운해졌달까.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은 내 안의 나에게 고집부리지 말자고 타이르는데 성공, 무엇이 나를 살게 할 수 있을 것인지나 생각해봐야겠어요. 그것이, 지금은, 옳은 것이라고, 믿으려고요.


  자, 들어주셨으니 감사. 진심으로, 감사. 깔깔깔.







  덧붙임) 사실은 이런 거였는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순간에는 항상 혼자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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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s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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