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갑자기 새로운 약속이 생겼다. 신바람 이작가님께서 냉면이 급 먹고 싶다며 홍대로 호출, 어쩐 일인지 오후에 집에 놀러온 친구와 냉면 먹고 싶다는 말을 했던 나는 콜, 뭐 이런 상황. 속이 싸해지는 비냉에 만두를 뚝딱 해치우고 엄청 길을 돌아 상수역 근처 상수동 카페에 안착. 커피를 마시면서 이러쿵 저러쿵 수다. 그리고 집에 어떻게 갈까 고민하다가 고맙게도 집까지 이작가님과 동행. 그리고 지금은 집이다.




  걸어오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도중에도 종종 한 가지 생각이 고개를 쳐들어 나를 위협했다. 늦은 밤 이 길을 함께 걸었던 몇몇 남자들의 팔과 다리가 흐느적거리며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어떤, 단, 한 사람만은 한 자리에 서서 오지도 가지도 않았다. 그가 하나의 지표가 되어 거기 서 있는 동안 나는 계속 걸으며 말을 멈추지 않았고 그에게 가까워졌다가 곧 그로부터 멀어졌다.

  남자는 곳곳에 서 있었다. 버스정류장 앞에, 편의점 앞에, 집 앞에, 현관에, 침대 위에, 곳곳에. 그러나 내가 아는 골목들과 공간들 속에서 수없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보행을 가록막기만 할 뿐, 오래 한 자리에 놓고 쓰지 않는 잡다한 물건들처럼 실상 내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버리고 싶은데 도통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냥 사람 형상을 한 흉물스러운 기둥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이 아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집으로 돌아가는 이유를, 그 때문이라고 하고 싶다. 이 집과 이 거리에는 쓸모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 내가 서 있을 자리가 없어서라고. 여기에 더 오래 있게 된다면, 결국은 내가 서 있을 공간이 점차 사라져서 그것들을 피할 수조차 없어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고.

  그렇다고, 이 나쁜 자식아.










  핑곗거리가 갈 수록 더 많아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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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차피 지나간 일, 억지로 끄집어 내서 아픈데 후벼파고 또 파고 또 파고 또 파고 아팠었구나 아팠었던가 아팠었지 같은 말을 계속 지껄여댔어. 다시는 이 앞으론 지나가지 않으리라 했던 마더 가든을 지나가고 말았지. 곳곳에서 너를 봤지. 나의 판타스틱한 일주일은 사실 전혀 판타스틱하지는 않았으니까, 떠올려본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래도 기억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멀스멀 기어나와서 길거리 난간에 걸터앉거나 나를 따라 엘레베이터에 타거나 나보다 먼저 내 자전거 위에 올라타서 옴짝달싹도 못 하게 이 바보야 멍청아 그러길래 네 마음이 깊어도 넘어가진 말랬잖아, 이건 다 네 탓이야 하네. 사는 것이 이보다 더 최악으로 떨어지거나 혹은 그 반대가 된다고 해도 위장을 쿡쿡 쑤시는 그 단발성 마음은 결코 잊히거나 묻히거나 사라지지 않는 걸까?



  진짜가 아니었을 거라고, 그보다 중요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기억 따위에 휘둘릴 거냐고, 아무리, 나를 다그쳐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서 놓친 마음을 만나면 당황스러워 숨이 다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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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엄마 젖을 물고 있는 애가 된 것처럼.
혹은, 한없이 부드러운 공기에 둘러싸인 것처럼.
잠들기 전에 한 번 사랑을 나누고 나서
저도 모르게 잠이 드는 순간이
가장 흥분된다지?
눈 떴는데 아직도 곁에서 벗은 가슴으로
가만가만 숨을 고르는 내가 좋았다고?





  그런데 나는 엄마처럼도 싫고 공기처럼도 싫고 섹스도 싫고 네가 먼저 잠드는 것도 싫고 겨우 잠들었다가 깨는 것도 싫고 그랬다며? 내가 바라는 건 다만 네가 나를 온전히 재워주는 거였다지? 









덧붙임) 춥고 괴로운 날 옛 생각을 떠올리면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재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날엔, 좀 끔찍했던 지난 날을 상기해보는 것도 나름 시간 떼우기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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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란하다면 심란하다고, 괜찮지 않다면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때때로 진짜 옳은 거 아닐까. 하여, 오늘의 나는 참 괜찮았다. 거짓말은 안 했고, 숨기지 않았고, 맘은 좀 짠했지만, 상당히 훌륭했어, 짝짝짝.






  이제부터, 함부로 사랑에 빠지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함부로 사랑을 시인하지 말아야겠다. 그래서, 나를 함부로 외롭게 만들지 않을 테야. 난 소중하니까.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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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낡은 연애사 2009. 12. 18. 03:29





  아무도, 내게, 잊어버리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 없다.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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