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를 하는 것은 좋다. 감정이 섞이면 훨씬 더 좋지만 감정이 없어도 몸은 잠깐 좋을 수 있으니까, 좋다. 그래서 도피처로 선택했던 적도 있었다. 싫지 않았다. 그게 아니면 밤새 대체 누가 곁에 있어준다는 말인가.

  농담삼아 수면유도남이 필요하고 했다. 영화 연애의 목적을 처음 봤을 때, 얼마나 공감했나 모른다. 십대때부터 시작된 정기적인 불면으로 오래 고생해온 나는 진심으로 수면유도남이 이상형이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놓여 어떻게든 잘 수 있게 해주는 사람에게 호감을 갖는다. 자고 싶은데 잠을 잘 수 없는 병은 많이 힘들고 어렵다. 일단 컨디션이 최악으로 치닫고 먹는 족족 얹히는데 그러면서도 술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일은 하게 된다. 두 시간 이상을 자겠다고 발버둥치는 일은 고욕이다. 그러니, 수면유도남이 얼마나 매력있는지는 말 다 했지.

  불면이 다시 시작됐다. 힘들다. 호주에 온 이래로 싹 사라졌다고 좋아했던 것도 잠시, 우리 집주인 언니 말마따나 익숙해지니 몸도 원상복귀된 모양이다. 열심히 치열하게 자고 자고 자고 자고 또 자고 싶은데 막상 잠들어도 깊이 못 자고 그나마도 몇 시간이면 끝나고 이 와중에 일도 가야 한다. 괴롭다.

  아무튼 그래서, 옛날 옛적 정말 막 살고 있었을 때, 지칠때까지 섹스하다 지쳐서 그나마 잠들었던 날들을 떠올리며 최근 나는 좀 외롭다고 생각한다. 이제 아무렇게나 사는 일은 어색하고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나는 철든 사람처럼 건전한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은 무지막지하게 생각없었던 날들이 그립기도 하다. 일단, 잠은, 자고, 싶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면 핵심은 못 집고 한 번 할까, 로 이야기를 마무리짓는 것들만 있고 나도 곧 스물 아홉인데 왜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진짜 내 것을 만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 건가.



  내가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리면 가끔 이상한 사람들이 검색해서 들어와 보곤 실망해서 페이지를 닫겠지. 내 이야기는 야한 얘기는 아니니까 뭐. 그냥 이건 내게 일어나는 리얼리티일 뿐이다. 현실의 나는 좀 지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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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본다. 유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고 유치한 걸 알면서도 멈추거나 건너뛰는 법이 없이, 죽, 앉아서, 본다. 나는 멜로 영화를 좋아하니까.


  어쩐 일로 내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건지 의심을 가졌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걸까 라는 의문도 가졌었다. 실제로 아무렇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왜, 음식을 만들다가 생각이 나는 걸까. 바닥을 뒹굴 수 있을 만큼 재밌는 이야기를 듣다가도 실의에 빠지는 걸까. 변기에 앉아 멍 때리고 있다가도, 손님이 많아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다가도 마음이 쓰이는 걸까. 마음껏 울어도 될 때는 울지 않았으면서 양치를 하다가 외출하려고 신발을 신다가 떨어진 단추를 다시 달다가 자려고 스텐드 전원을 끄다가 이렇게, 마음 한 구석을 헤집는 생각을 해버리고 마는 걸까.







  끈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랑을 할 때조차도  내가, 끈기가 없을 거라고 믿었던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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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으로 들어가기 전 몇 달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나에게 사귀자고 했을 때 이미 이런 식의 연애의 결말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까지 이 녀석이 개념이 없을 줄은 정말이지 상상하지 못 했다.

  같이 있었던 두 달 동안 어쨌든 덜 외로웠으니 시간이라든지 돈이라든지의 소비 때문에 발생한 무수히 많은 문제들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설사 같이 잘 파트너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기분은 좀 나쁘지만 참을 수 있다.

  하지만, 하루 같이 놀고 헤어지는 놈들도 재밌게 잘 놀았다, 잘 가라는 인사 정도는 할 줄 안다.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리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이기적이고 어린아이 같은 놈이었다니, 나는 그게 가장 화가 난다. 진심이었던 아니었든 끝낼 때는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끝을 내야 하는 것이다. 어디에선가 그 멍청한 년은 나한테 그냥 당한거야, 라고 실실 웃고 있다면 분명히 그 자식은 알아야 할 거다. 자기 인생을 그렇게 허섭한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연애는 진심이 아니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자기 삶을 그렇게 더럽게 살면 진짜 더러운 놈이 될 거야 넌. 난 네가 서른 가까이나 처먹고서도 그걸 모르는 게 너무 너무 한심해.




  난 이래서 진짜 연애가 귀찮다. 저 좋을 때는 잘 보이려고 난리고 아니다 싶을 땐 참으로 가차 없이 양심이나 매너를 버리게 되니까.
 
  요만큼의 상처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니 그것 또한 가관이라 거울 속 내 얼굴도 쳐다보기 민망하다.




  화가 안 멈춰진다 호주에 온 이후로 계속. 사람들은 나를 실망하게 만들고 사람들은 내게 실망한다. 외국에 나왔다고 해서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행운 역시 아무때나,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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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가 끝날 때마다, 이제 사랑하지 않으니까 헤어지는 거라고 깨달았을 때마다, 아 점점 어른이 되어 가는구나 나란 사람도, 라고 생각했던 것도, 그것도 사실은 거짓말이었을거야.


  백수가 될 때마다, 돈에 쪼들리거나 심적 압박이 클 때마다 어쩐 일인지 나는 지난 연애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냥, 그렇다. 궁지에 몰리면 그렇게 되어 버린다. 좀 더 비참했거나 마음이 저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던 순간을 찾으려는 시도인지도 모르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해주지 않고,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나는 좋아지지 않는다. 이게 내 연애사 일련의 법칙쯤 되는 듯하네. 나를 좋아한다는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되면(그 반대의 경우엔 상대가 거의 나와 사귀어 주지 않았으므로) 바라는 일이 더 많아지고 충족은 더욱 안 되고 그래서 일방적으로 끝을 내버리곤 했었네. 아, 그랬지.


  좋아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언제나 상상해왔다. 첫사랑이었던 사람과 2년 연애했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가 어린 나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아는 여자와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어도 그래도 나는 그 빌어먹을 자식을, 그 때의 그를 잊지 못 한다. 그는 내게 매우 너절한 행동을 보였지만 그래도 그의 마지막 편지에는 고마웠다고 그러나 미안하지는 않다는 정직함이 있었지. 


  가장 최근까지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은 학교 선배였다. 5년이나 혼자 좋아하다가 마지막에 그만 빵, 터진 감정 덕에 이래저래 친구로 지내기도 힘든 상태가 됐지만, 벌어질 일은 벌어졌고 후회하기에 내 5년은 얼마나 예뻤나를 상기하면 그저 나직이 한숨 쉬고 슬쩍 웃음이 나오기까지 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게 되면 좋아하는 감정을 더이상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를 상상하면 몹시 괴롭다.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는 것보다 좋아하지 않는 마음을 숨기며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만한 사람들이라면 알겠지. 미안하고 말 일이 아니다. 거짓말과 진실 사이에서 이래저래 줄타기를 하며 균형을 잡거나 솔직하게 아직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털어놓은 채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면, 뭘, 선택해야 하는 걸까.







  내가 좋아했던 남자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행복하게 살고 있으까. 가끔 나를 생각해줄까.


  난 나쁜년이 분명하다. 나를 그렇게나 좋아해주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훨씬 많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내가 좋아했던 이들의 이름이 언제나 먼저 떠오른다. 그 사람들도 나 같다면, 그들도 지금, 난 나쁜놈이 분명하다고 생각할까. 








  10대의 연애는 그 자체로 나를 설레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20대 초중반의 연애는 몸의 대화가 언제나 중요한 화두였지. 28살. 20대 후반이 된 나는 이제 연애라는 말로 설레지도 않고 섹스라는 주제에 지속적인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내게 필요한 건 내가 좋아해서, 내가 좋아한다고 큰 소리로 거리에서 외치는 일이 가능하게 해 주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거짓말을 하며 만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지지고 볶고 싸우고 이런 게 사는 거라고 하는 거, 그게 정답이라면 정답이 아닌 길을 가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새삼 다시 생각한다.







  그나저나 왜 이런 생각을 자꾸 하게 되지. 지금 힘든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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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역사가 깊다고? 그래, 우리에게도 막 만들어진 새 집을 보는 순간처럼 두근대던 날들이 있었지. 천장 높은 거실과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안을 들여다보면서 집안을 울리는 공기와 우리 둘의 목소리로 서로를 채우며 끝나지 않는 시간을 꿈꾸던 그 때를 말하는 거야. 서로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그렇게 장난을 치며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았을 거야. 아마, 그랬을 거야. 가끔은 내가 너를 할퀴고 네가 나를 짓이기며 시간 낭비를 하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게 함께한다는 거니까.


  그렇지만, 그건 우리가 함께하기로 결정한 다음에 벌어져야 했던 일이야. 한 번 포기한 시간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 법이니까. 우리가 각자로부터 멀어졌을 때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팔아넘긴 거야. 그래서 나는 생각해. 이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라고. 나한테 손 내밀지 마, 너에게 나를 맡기지 않을 거야.


  내 몸에서 싹이 움트던 계절에, 내가 나무가 되고 싶었던 그 날에, 너를 위해 그림자를 드리워주고 싶었던 그 오후에, 잠을 이루지 못 해 뒤척이던 널 위해 꿈의 담요가 되어주려던 그 밤에 너는 없었지. 꽃이 피기도 전에 내 몸이 말라 바스라졌던 걸 너는 꿈에도 모르겠지.


  자, 마음의 역사가 깊다고 했니? 아니, 우리에게 남은 것은 낡은 추억이나 팔고 있는 기념품 판매대뿐이지. 거기에 진짜 역사 같은 건 담겨져 있지 않거든. 싸구려 열쇠고리에 추억을 되새기자는 말이라면, 됐어. 그만두자. 네가 하는 짓거리를 역사 왜곡이라고 하는 거야. 한 번 아닌 사람은 다신 아닌 거야.





  그리고 말인데,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탈난다고 했니, 안 했니? 외롭다고 함부로 연애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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