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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에서 내려 걷는데 저 앞에 신호등에 녹색 불이 켜졌다. 뛰었다. 그 순간을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편의점에 들러서 수면용으로 맥주를 한 병 사서 나오는데 다시 녹색 불이다. 생각한다. 나는 왜 그렇게 뛰어다녔지? 신호 바뀌는 거 금방인데.   


  아침마다 지하철 역에는 뛰는 사람들 천지다. 학교에 가면 강의에 늦을까봐 엘리베이터도 안 타고 계단을 종종종종 뛰어다닌다.
  어디 뛰는 것뿐인가? 술꾼들은 술 모자랄까봐 잔 비우기 무섭게 채우고, 애인들은 손 잡기 무섭게 모텔로 향하는데 뭐. 다들 이렇게나 바쁘게 사는 걸. 좀 느긋하게 살면 안 되나?




…… 라고는 해도, 서울을 떠날 수가 없다. 이런 서울이 싫다고 말 못 한다. 다들 바쁘게 사는데 저 혼자 느리게 살고 있다고 왕따 당하는 기분이 들어도 서울은 썩 괜찮은 도시라고 생각한다. 다른 도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한강 야경만 봐도, 숨가쁘게 바쁜 것 정도야 참아 줄 수 있다고. 괜찮다고.


  여기, 서울에서 나를 끌어내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치사하게 능력도 없는 주제에라고 얘기하면서. 그런데 알까. 도쿄보다도 드레스덴보다도 심지어 파리보다도 서울을 사랑하고 있다. 물론 가본 적 없는 도시들이지만.  


  다들 회귀본능 운운하며 고향 찾는 게 당연하다고 하면서 내가 태어난 곳이 서울이고 서울에서 살아온 시간이 다른 도시에서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래됐는데 왜 내 회귀본능은 이해 안 해줘. 왜. 내 서울 사랑이 뭐가 나빠. 빽빽한 빌딩숲이고 무허가 간판들이고 빈부격차도 미친 듯이 심하고 살기 각박하고 땅이 꺼질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서울도 내가 다 사랑할 수 있다는데. 미친년놈들이 밤마다 고독하다고 꺽꺽대는 이 도시가 좋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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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s G.

다시 시작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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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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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후, 2007년 3월 23일이 곧 닥쳐올 것임을.


  울 수 있으려나, 이제는.
  마춤맞은 친구의 발언으로 봉인이 풀렸다.
  이제 봉인을 다시 하는가, 이대로 인정하고 살아가는가 하는, 선택만이 남아 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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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s G.

다시 시작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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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네 혀에 뿌리를 내리겠다.
  네 눈으로 함께 빛을 보고 네 입을 통해 받아먹으며 네 머리카락 사이로 잎을 내고 네  손끝에서 꽃을 피울거야.
  우리, 하나가 되자.



  이런 낯간지러운 고백을 당신에게 하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다가, 그만, 내 손톱 밑으로 말라 비틀어진 꽃잎을 발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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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s G.

다시 시작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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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0ml짜리 맥주를 (아주 오랜만에) 마셨다. 냉장고 문을 열고 살그머니 꺼내서 빈 방에 들어가 혼자 조용히.

  술을 마시고 나서 이런 저런 헛소리들을 지껄였던 기억이 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완성되었던 글이라던가, 동네 떠나가라 불렀던 노래, 혹은 혼란한 정신을 틈탄 고백 같은 것들.
  어째서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 못 해냈던 일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대전에 내려와서 마지막 졸업 인증용 토익 시험을 봤고,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고, 악보도 없이 외고 있는 간단한 피아노 연주를 했고, 엄마와 한 번 싸우고, 할머니 대신 괜히 설거지를 해보고, 이렇게 혼자 맥주를 한 병 마셨다. 이상한 것은,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 아무리 혼자 술을 마셔도.
  어쩐지 슬프다. 괜히 술을 마시면 소설이나 희곡이나 시 같은 것들이 써지곤 하던 때가 그립고, 울다 웃으며 노래할 수 있었던 박력도 그립고, 내일이면 부끄러울 고백도, 그립다. 아픔도 슬픔도 모르는 청춘의 아가씨가 슬프다고 생각했던, 그런 날들.

  이게 뭔가. 어째서 지금은 아프거나 슬프고 싶지 않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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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s G.

다시 시작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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