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서울에서 사업 잘 하다가 같이 일하던 사람 배신으로 사업을 말아먹은 적이 있다.화가 나서 회사에 보관중이던 자재들을 다른 곳에 팔지 않고 다 태워버렸다고 했다. 돈도 돈이지만 배신은 원래 더 힘든 법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나는 아빠가 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장사하던 집에 부도가 나면 인생의 급이 바뀌는 것이 무언지 확실하게 알게 되는데 사장님 큰딸에서 형편 어려운 집 아이가 되는 것은 생각보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는 했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흐르고 나서 아빠는 동생 친구의 아버지가 사정이 어려우시다고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분은 몰래 몰래 가게 상품을 빼돌려 아주 오래 잘 해먹다가 걸리셨다. 무릎꿇고 비는 통에 고소는 안 했지만 돈도 못 돌려받고 거래처 신용도 잃고 내 동생은 어이 없이 친구도 못 보게 되고... 그 아저씨는 전에도 공무원하다 세금 탈세 비슷한 걸로 해고당했다는데 사람은 진짜 잘 안 바뀌는 동물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도 아빠는 어리석었다. 그냥 고소해서 감옥에 넣었어야 했다.

 

뭐 어쨌든, 무턱대고 믿은 덕에 사람에게 당해 이래저래 피해를 많이 봤다. 그리고 아빠가 자꾸 그런 사람들과 일하게 되는 이유는 본인이 성격이 너무 강해 누구든 그 밑에서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고, 그걸 감수하고 버티는 사람들 중에는 좋은 사람들보다 나쁜 사람들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언제든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눈 앞에서 알랑방귀 뀔 수 있는 거랄까...

 

우리 집안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니고, 비슷한 느낌의 기사들을 읽는데 포인트를 잘못 집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서. 어리석고 미숙한 게 잘못이지 그런 사람 구분 못 한 게 멍청한거야... 등의 반응이 너무 많아서 놀랐다! 허허허

똑똑한 사기꾼과 어리석은 구매자 중에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따지자면 당연히 사기꾼이지...

 

딴 꿍꿍이를 가진 게 분명한데 크게 범법행위는 하지 않은 건물주와 월세 한두달 밀렸다고 예쁘게 꾸며 놓은 가게에서 계약 기간도 남았는데 아무런 회생 절차 없이 쫓겨나야 하는 세입자가 있으면 나쁜 쪽은 어디인가.

 

이 사회는 정말 글러먹은 것 같다. 가진 사람들의 횡포나 농락에 분개하는 사람들보다 그런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는 것도 슬프다. 그리고 더 슬픈 건, 나도 어쩌면 남들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내 안락만 향해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

 

나는 요즘 '어쩔 수 없지, 세상은 그런 거니까, 그냥 긍정적으로 쿨하게 넘어가' 따위의 말에 자주 흥분한다.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나 혼자 잘 살면 되는 걸까
세상은 원래 그런거니까 안 되는 일에 힘 쓰면 안 되나
마음상해 죽게 생겼는데 긍정을 강요당하고 쿨해져야 하나

 

안 그렇게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사는 것이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수순이라는 것, 그러니 대충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는 별 거지 같은 충고들을 '아직'은 사양한다.

 

다행히 나는 아직 혼자라 지켜야 할 게 적어서 그런가, 여전히 화나는 일도 많고 포기 안 되는 것들도 있다. 내가 아직 쿨하지 못 해서 다행이다. 아직 나는 내가 쿨함을 강요당해야 할 때마다 쿨몽둥이를 과감히 꺼낼 줄 안다. ㅋㅋㅋㅋㅋ

아, 정말 오늘 왜 이렇게 이런 잡생각만 들고 집중이 안 되나... 자, 일하자!

 

덧> 계란으로 바위를 쳐 본 사람들이 있으니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속담이 나온 거겠지. 지금 당장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이 뭔가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건 조금의 가치는 있기 때문 아닐까. 그래서 난 옛날 속담들도 다 맞다고는 생각 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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