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는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던 영화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감독으로도 잘 알려진 가스 제닝스 감독의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과 함께하는 영화이기도 하고.

 

  아주 오랫동안 좋아했었던 남자에게 우발적으로 고백한 뒤 하게 되었던 데이트 때, 필름 포럼에서 마침 상영중이었던 이 영화를 봤다. 그는 이 시간엔 아마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고 지나가듯 말했었는데 극장에는 우리 빼고 개미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있거나 말거나 어차피 보이지도 않았을 테지만). 지하에 있는 작은 상영관에는 우리 둘 뿐이었고,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고, 영화가 상영되기 직전 극장은 암전이 되었고, 우리는 키스했다. 세상이 갑자기 나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려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면 되는 것이라고 믿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와 나는 잘 되지 못 했다. 그에게는 의리를 지켜야하는 애인이 있었고, 나는 난데없이 선택의 순간에 이성을 되찾았다. 얼마 지속되지도 못 할 이성이 왜 하필 그 순간에 출현한 건지 아직도 의문이다. 아마 그가 나를 여자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우리는 친한 선후배였다) 이 우스꽝스런 시나리오의 결말이  눈에 훤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착한 사람 코스프레라도 하고 싶었는지도.

 

  고백 이후 딱 일주일 거의 매일 만나며 때때로 우리는 선을 넘었지만 거기에 일말의 사랑이라도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내가 가졌던 오랫동안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좋아해주는 판타지를 가졌고, 믿었고, 일주일의 혼란 속에 그 판타지 멜로에 탑승했다가, 끝내는 그것으로부터 조롱당했다.

 

  버스안에서부터 필름포럼까지 내내 붙잡았던 손에 땀이 흥건했었다. 놓고 싶지 않았던 그의 손을 떠올리면 지금도 좋다. 그가 나를 버리기 애매한 후배로 생각했더라도 좋았고, 오랜 연애의 틈을 잠깐 메우는 여자로 생각했어도 괜찮다. 나는 아직도 선배라는 단어를 내뱉으면서 스스로 흠칫 놀라곤 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일어날 일은 그의 말처럼 일어나게 되어 있었고, 일어났고, 아팠고, 지금은 연락조차 주고받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선배는 내 연애의 트라우마가 되었지만 더이상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은 아니다. 내가 왜 그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그것이 삶의 원동력이 된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나는 더 많이 그를 좋아했고, 그의 세계를 사랑했다. 그것이 진짜였든, 속임수였든 중요하지 않다. 그로 인해 내 세계는 살짝 뒤틀려졌고 방향은 전환이 되었으며 나는 또 다른 내가 되었다.

 

  나(실제의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은 아주 졸작으로 관객 두 명의 초라한 기록을 남기고 잊혀져갔다. 그러나 데뷔작을 시작으로 나의 세상은 다르게 굴러갔고, 그 세상을 잘 다듬어가며 나는 계속 살아가고 있다. 매순간 행복하려고 노력하면서.

 

 

 

 

  언젠가 한번은 다시 만나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알던 그가 아니라도 웃으며 인사할 수 있을 때, 하지만 내가 아직 닳고 닳은 한심한 인간이 되기는 전에 반드시 그를 보고 웃으며 인사하고 싶다.

  내가 아직도 기억해. 현실에 발목잡히지 말자던 너의 말을 기억하고 있고, 그렇게 하며 살아가느라 내 인생은 이 지경이 되었지만. 나쁘지 않은 시간이라 참 고마워.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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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s G.

다시 시작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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