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갈피를 잡지 못 하고 한 곳에 정착하는 방법도 잘 모르고 통장 잔고는 늘 들쑥날쑥하던 나는 호주에 와서도 여전히 그랬다. 사람 변하기 힘들다더니 9개월 동안 한 거라고는 쓸데없이 돌아다니고 돈 쓴 일 밖에는 없었다. 그래도 나태한 나는 계속 낙담만 하고 힘든 일들에 여전히 한쪽 발을 담근 채로 기웃기웃 도망갈 자리나 돌아보고 있었다.


  여기 와서 만난 사람들은 전부다 쿨한 척만 했다. 쿨한 척을 하는 건 티가 난다. 그런 사람들을 싫어하면서 외로웠던 나는 기꺼이 거기에 동참해 웃고 떠들며 시간을 소모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돈 쓰고 정 주고 하는 게 사람 사는 맛이라고 나를 속여가면서 여기까지 왔다.


  오늘, 랭귀지 스쿨에서 만났지만 한 번도 같은 수업을 들은 적이 없는, 단지 친구의 친구이자 이웃사촌으로 만났던 한 언니가 내게 천불이라는 거금을 빌려줬다. 이 나이에 백만원쯤 우습게 모아둔 사람들도 많다는 걸 나도 안다. 내가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렇다 쳐도 여기에서 천불은 맨몸으로 낯선 나라에서 몸 상하고 마음 상하며 일이주를 버는 돈이고 그걸 아는 나는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따뜻해서 자려고 누워있다 말고 그만 왈칵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처음 돈 얘기 꺼냈던 날 언니가 선뜻 빌려주마하며 어차피 마음 먹은 거 돌아와서 잘 살라고, 다들 고만고만하게 산다고 문자를 보냈다. 정말 다들 고만고만하게 사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때만해도 급한 불을 껐구나, 하고 나는 단지 안도했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난 뭐가 그렇게 잘 나서 지금까지 이러고 살았던 걸까 난생 처음 후회를 한다. 겁많고 매사 소심하고 귀찮은 일은 손도 안 대면서 헛물만 켜고 이것저것 다 실패하기도 전에 포기하고 살았던 주제에 남들에게 입바른 소리나 척척 해댔던 내가 부끄럽다.


  내가 좋아 죽을 것 같다던 전전 남자친구들도 아니고, 너 같은 귀여운 동생이 있어 다행이라는 듯 술사주고 놀러나 다니던 언니 오빠도 아니고, 아직까지 계모임을 하는 고등학교 동창도 아니며, 심지어 가족도 아닌 한 사람의 마음에 감동받았다. 돈 천 불이 아니고, 급한 불을 꺼줘서가 아니라, 진짜 내 인생을 걱정해주는 사람을 여기 이 타지에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말이지 열심히 열심히 살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고 앞을 똑바로 바라봐야한다고. 더 이상 한국에서 겪었던 나쁜 일들과 호주에서 느꼈던 사람들과 나에 대한 실망감에 얽매이지 말고, 주변에서 길을 잃지 않게 가로등을 켜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면서, 더이상 아무것도 탓하지 말아야 하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나를 진짜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잘 할 걸, 잘 할 걸 하는 마음이 넘쳐나는 밤이다.


  퍼스에 돌아가서, 겁먹게 되더라도 뭐든지 해야겠다. 이 마음가짐을 워홀 9개월차가 돼서야 겨우 깨달았다니. 지나간 시간이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비싼 돈 낸 만큼 좋은 수업이었다고, 어디선가 나를 다독이는 소리가 들린다.






  나를 도와주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이상 누가 되기 싫다. 잘 살자,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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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s G.

다시 시작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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