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아름다운 유배지 2007. 9. 17. 01:33

  2년만에 찾은 양양, 아파트는 변함없이 그대로, 그 곳에서, 그렇게 있었다.


  숙박비는 없고 여행은 가고 싶고, 사실은 양양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 일행들을 졸라댔더랬다. 주말이라 서울을 빠져나가고 또 서울로 들어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힘 같은 것들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만 같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나는 가끔씩 멍하게 시선을 둔 데 없이 창밖을 내다봤다.

  2년 전에 내가 두고 갔던 노란 우산도, 쓰레기 봉투도 그대로 있었다. 베란다 티테이블 곁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면 멀리 파도치는 모습이 보였고 가끔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익숙하기도 했고 아련하기도 했고 두려워지거나 화를 치밀어오르게 하기도 했다. 왜 그런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무엇이 나를 그토록 혼란스럽게 만드는지도 잘 몰랐지만 다만 머릿속에서 끝없이 울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건 아니야. 지금 이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는 안 돼."

  토요일 밤, 술을 마시고 놀이터에서 빙글빙글 돌리는 놀이기구를 탔었다. 한쪽 다리에 중심을 두고 다른쪽 다리를 살짝 들면 회전 반대 방향으로 발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찔한 느낌이 좋았다.

  그날 밤 일행들이 일찍 잠이 들고 나는 티비가 끝나는 시각까지 채널을 돌려가며 '럭셔리 카'라는 영화라든지 '그것이 알고 싶다', '뉴스', 'CSI', '스포츠 뉴스' 등을 차례로 보았다. 남은 맥주를 홀짝이며 바다 바람을 맞고 잠이 쏟아질 때까지 버티고 버텼다. 최대한 고민하지 않으려고, 이상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헛헛한 느낌에 시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오고가는 차 안에서 괜히 일행들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고 툭툭 말을 자르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깔깔 웃다가 입을 꾹 다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높은 지대를 달리다가 귀가 먹먹해지면 침을 꼴깍 삼키면서 담배를 한 대 물었고 몇 미터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안개 속에서는 타임머신 이야기를 하며 예전 생각을 했다. 머리가 복잡해지거나 멀미가 나면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잤다.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한순간 내뱉어버리기도 했다.

  "이제 그만 만나야지 싶은 사람들은 애쓰지 않아도 조금씩 멀어지게 돼요."

쓸데없이 단호하고,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생각하고 나온 말이 아니었고 걸러야 했는데 걸러내지 못한 말이었다. 무서웠다. 마치, 주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나 혼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고 이것이 나의 한계라고 판단할 때마다 지긋지긋했다.

  일을 하고 싶지가 않다. 수다스러운 사람들과도 함께 있고 싶지 않다.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예의있게 이쪽에서 그쪽으로 지금 넘어갈테니 양해해 달라고 말할 줄 아는 이와 종종 만나 차분하게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쳐있다는 것을 알아주고 그가 알아준다는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나를 볼 수 있도록.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일은 내가 점점 더 고약하고 이기적이며 철이 없는 멍청한 여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 삶에는 오래도록 발전이 없었고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가치 없는 삶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렸던 그림들이 전부 어디로 갔는지, 스케치 한 장 남아있지를 않고, 이렇게 끝도 없이 나는, 파도가 자꾸만 올라오는 모래사장 위에, 그림을 그리려 하고 있는 걸일까? 윤곽선을 잡을 때마다 양양의 바다에서는 가차없이 파도도 그림을 지워버렸다. 내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고 이렇게 더 이상은 못 그리겠다,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지, 하는 마음이 가득 차 이제 더는 모래 바닥 같은 건 돌아보고 싶지도 않아졌다.



  그런데, 그래도, 밤의 바다는 아름다울텐데 하는 생각이 오래오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어쩔 수 없는 거구나 싶기도 했다.

  쓸쓸하고 또 아름다운 1박 2일의 여행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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